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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희생당한 선각자란다” 양성평등 사회 꿈꾼 나혜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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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민족발달상 또는 가정개량상 어느 정도까지는 여자의 인격을 인정함이 유리할 줄로 생각한다(‘혼인론’·1917).” 당대의 지성 이광수조차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여성을 여기려 하지 않던 그때. 일본 유학 중이던 18세 나혜석(1896~1948)은 “현부양부(賢父良夫)의 교육법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현모양처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상적 부인’·1914)”이라고 남성들의 종속적 여성관에 반격의 직격탄을 날렸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이 되도다./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나를 사람으로 만드는/사명의 길을 밟아서/사람이 되고저(‘인형의 家’·1921).” 결혼한 지 일 년 남짓 26세 새색시는 인형 아닌 사람으로 살고팠다. 자기 몸의 주권 찾기와 남성과 동등한 사람 되기에 발벗고 나선 그녀는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사랑걸신증이라는 성적 박테리아가 방방곡곡을 휩쓸어서 인심이 자못 퇴폐한 모양이오. 이에 따라 이혼, 야합이라는 희비극이 날을 따라 도처에 연출되는 모양이오(염상섭 ‘감상과 기대’·1925).” 신여성이 꿈꾼 자유연애가 비아냥의 대상이던 그 무렵 남편 김우영과 함께 떠난 세계여행길. 파리에서 그림 공부 하던 그녀(사진=나혜석기념사업회 제공)는 남편의 친구 최린과 파리의 연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남편이나 본부인을 어떻게 하지 않는 범위 안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 생각하오(‘이혼고백장’·1934).” 그러나 등 돌린 이는 남편과 연인만이 아니었다. 사회 전체가 적개심을 드러냈다.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그녀의 말마따나! 가부장권과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그때 남녀동권을 꿈꾼 그녀의 삶은 실패로 예정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치열한 삶을 산 나혜석은 오늘 수많은 알파걸들을 낳게 한 한 알의 밀이었다.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바꾼 것은 우리가 진정한 양성 평등사회의 도래를 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