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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쓰실 순 없나요” 아들에게 한 방 맞고 썼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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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시에 죄다 ‘못난 시’란 제목을 붙였다. 그러니 시집 제목은 『못난 시들』(이룸)이 될 수밖에 없다. 김지하(68) 시인이 3년 만에 낸 신작 시집이다. 산문집도 4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 악마부터 2008년 촛불까지, 광장을 흔든 대중의 움직임을 고찰한 사회 비평 에세이 『소근소근 김지하의 세상이야기 인생이야기』(이룸)다. 6일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출간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시인은 어찌하여 ‘못난 시’를 쓰게 됐을까.

서울 청계광장 위에서 ‘꾼’들이 데모하는 걸 지켜만 보던 여중생들이 김지하 시인에게 “저건 촛불이 아니라 숯불”이라고 알려줬단다. 숯불은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시커멓게 피우는 욕심 덩어리라, 촛불처럼 다소곳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앙포토]


◆아들의 비판과 부탁=김지하 시인에겐 아들이 둘 있다. 각각 30대 중반, 20대 후반 촛불 세대다. 부자지간에 촛불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 두 아들이 아비에게 한 방 날렸다.

“아버지 시는 왜 이렇게 어렵습니까? 너무 잘나게만 말고, 조금 못나도 쉽고 재미있고 쿨하게 쓰실 순 없나요?”

아비가 물었다. 너희 세대도 내 시를 읽느냐고. “촛불 세대도 ‘오적(五賊)’은 읽지만, 그 뒤로 나온 시들은 어려워서 못 읽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못난 시를 쓰기로 한 시인은 한없이 몸을 낮췄다. 일흔을 바라보는 그는 ‘지공’ 즉 ‘지하철 공짜’가 인생의 낙인 경로우대 대상자. 촛불 앞에서는 “나는 디지털 엠비도 노사모도 아닌/신좌파도 신우파/환경연합도 아닌//그저/이름 없는/직업도 없는//한/아날로그/꼰대”(‘못난 시 102’)에 불과하다고 노래한다. 집에서라고 다르랴. 이른바 ‘방콕’ 중인 막내 아들이 “제 방에 드는/나를 가로막”고, “우생순이/중국 종 마늘 새순인가?”라며 갸웃하는 그에게 “그걸 왜 모르세요?”라 면박을 준다. “내가/내 아드님에게/긴긴//그러나 내겐/아주 절실한/인생 경험담을 한없이 진지하게//내 딴에 열심히 멋들어지게/침 튀기며 다하고 난 뒤//아드님/왈//‘꼭 두 시간이에요/더 하실래요?’”(‘못난 시 73’중)

◆‘못난 시’ 속 ‘잘난 시’=‘못난 시 888’에선 세 살 아래 노파에게 ‘너 먹고 싶다’며 수작을 걸다 거절당하자 “사실은/서지도 않아 임마. 헤헤헤헤헤”라며 물러서는 풍경을 그렸다.

“야한 시라 발표할까 말까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늙다리도 연애 감정이 있다, 이놈 새끼들아!’ 하고 젊은 애들한테 말해야겠다 싶어 넣었죠. 못난 거지 뭐….”

제목 뒤에 붙은 번호엔 질서가 없다. 1, 2, 3으로 흘러가다 9999, 0.008, 번호없음 등이 막 튀어나온다.

“아무리 못난 시라도, 제목은 시의 핵심이라 잘나게밖에 표현이 안 되지요. 중복되는 번호만 없게 마구 붙였어요.”

그런 카오스, 혼돈 속의 질서는 촛불에서 목격했다. “지도자도, 조직도 없고 제멋대로 개판이리라 여긴 움직임이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으로 치러지더군요. 나중에 제 이익만 챙기자며 시커멓게 고기 굽는 숯불 들고 나선 이들 말고, 그 이전의 말갛고 고운 촛불 말이오.”

그는 촛불에서 청소년·여성 등 약자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동학의 ‘후천개벽’ 징후를 읽었다. 그런 우리 고유 사상을 못난 시에 담아냈다. “못난 것 같아도 자꾸 읽히는” 잘난 시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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