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새 모델'로 가는 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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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단기외채협상이 타결돼 고비를 넘긴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높은 금리도 부담이려니와 당면한 구조조정이 결코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한국의 위기를 지켜보는 외국인들의 반응은 실로 다양하지만 그 중 한 가지는 곱씹을 만하다.

즉 개발도상국들의 모델이 되다시피한 '한국형' 성장전략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 한국이 한편의 새로운 드라마를 연출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한편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왠지 꺼림칙하다.

예를 들어 미국이 기대하는 모델은 스스로 '신 (新) 패러다임' 으로 부르는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IMF시대의 진정한 도전이라는 생각이다.

새로운 모델에는 도대체 어떤 것이 담겨야 하는가.

또 이것이 우리의 전통적 사고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가령 기업지배구조의 혁신수단으로 거론되는 사외 (社外) 이사제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까. '국부 유출' 을 심심찮게 들먹이는 정서에서 대다수 금융기관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현상을 참아 낼 수 있을까. 더욱이 시장경제를 주장하면서 고통을 분담하자니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고통당해야 마땅한 사람이나 부문이 고통당하는 것이 시장원리다.

금 모으기운동만 해도 그렇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금가락지를 내놓았으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잘사는 동네를 돌며 금괴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은 분명 반 (反) 시장적이다.

그래서 '한국형' 시장경제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푯대는 미국이 돼야 하는가.

대답은 글쎄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면 슈퍼마켓의 계산대나 지키는 것이 고작이다.

하루 8시간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겨우 월 1천달러 정도. 맞벌이가 아니면 월세 7백~8백달러를 줘야 하는 괜찮은 동네 아파트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은 7년전과 다름없다.

사상 최장기 호황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차는 더욱 벌어졌고 저소득층에 대한 혜택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마약과 낙태와 이혼이 만연한 나라, 그래서 친부모와 사는 자녀들이 흔치 않은 사회, 백인동네에 흑인이 이사 오면 하나둘 떠나는 인심, 그것이 미국이 아닌가.

사회.문화는 그냥 두고 경제에만 시장원리를 적용할 수는 없다.

이질적인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되 우리의 체질까지 바꿔야 할지 모른다.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을 하자면 진지한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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