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 난]애태우는 기업들…대기업도 조업단축, 일부선 사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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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환율이 올라 수출여건이 나아지면 무엇합니까. 물건을 만들 원자재를 구할 수 있어야죠….” 금융공황 이후 기업들이 원자재를 못구해 아우성이다.

알루미늄 등은 환율상승으로 값이 껑충 뛴데다 재고가 거의 바닥나 돈 주고도 물건을 못구할 지경이다.

1월말 현재 국내 재고는 나프타의 경우 보름, 액화천연가스 (LNG) 와 고철은 기껏 열흘 분량에 불과하다.

은행들이 신용장 (L/C) 개설을 거의 중단함에 따라 전 분야에서 기업들이 해외에서 물건을 사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뉴욕 외채협상 타결을 전후해 일부 대기업의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은행들은 여전히 현금예금이나 담보없이는 L/C개설을 기피해 아직도 정상적인 수준까지는 까마득한 상황이다.

일부의 사재기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환난 (換亂)' → '원난 (亂)' 에 이어 '원자재 대란' 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상황이 하루속히 개선되지 않을 경우 자칫하면 재고가 없어 물건을 못만들어 수출을 못하는 최악의 사태가 빚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현황과 문제점을 짚어본다.

◇ 발목 잡힌 수출.내수 = 앨범 제작업체인 한성산업의 김동규 (金東奎.42) 사장은 수출주문을 받아놓고 설 연휴 내내 제지 회사 경영진의 집을 찾아다녔으나 아직 물건을 못구해 애태우고 있다.

앨범업계 5위권인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미국 등 10개국으로부터 3개월 생산물량 (1백20만개) 을 주문받아 생산라인을 풀가동시켰으나 12월들어 백상지와 비닐 (PVC) 공급이 끊기는 바람에 올 초부터 작업을 중단했다.

게다가 남은 재고로 만든 물건도 골판지 상자를 구하지 못해 지난해 12월 수출물량의 40%만 선적하는데 그쳐 손해배상 클레임까지 받았다.

金사장은 “제지회사로부터 '선금을 내고 기다리라' 는 말만 듣고 있다” 며 “물량을 확보해 놓고도 원료가 없어 수출을 못하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다” 고 말했다.

경기도부천시 S플라스틱의 金모 (45) 사장도 “지난해 11월 t당 84만원이던 재료비가 지금은 1백20만원대에 이른데다 현금 아니면 사지도 못한다” 며 “반면 제품값은 올리지 못해 아예 생산을 중단했다” 고 말했다.

이같은 사태는 거의 전 업종에 걸쳐 벌어지고 있으며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대우전자는 원부자재 부족사태가 벌어지자 최근 내수뿐만 아니라 수출생산 라인까지도 모델별로 가동률을 낮추고 있다.

대우전자 구매지원팀 관계자는 “최근 원자재 공급은 조금 늘었으나 하청업체들이 자금난 때문에 부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어 생산차질이 우려된다” 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부품업체들의 원자재 부족이 심각하다” 면서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머지않아 완성차 업체 전체 라인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 이라고 말했다.

◇ 사재기와 선금 구입 = 원자재값은 수입량의 절대부족에다 환차손까지 겹쳐 2배 이상 오른 품목이 많다.

그나마 오른 값으로도 원하는 물량을 구할 수 없고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도 과거의 2~3배에 달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 수입상.도매상 등은 값이 더 오를 때를 기다려 물건을 내놓지 않거나 사재기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문구업체 M사의 구매담당자는 “플라스틱 원료인 사출수지 등을 취급하는 일부 대리점은 창고에 물건이 쌓여 있어도 풀지 않고 있으며 제품 박스로 쓰이는 마닐라지의 사재기도 심하다” 고 전했다.

인천시 남동공단의 전자업체 고창산업 관계자도 “수입상들이 일부 부품값이 조만간 오를 것이란 소문이 나돌자 물건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상당수 업체들은 대리점에 선금을 내놓고 나올 때를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경기도부천시의 플라스틱 업체 K사는 “예년에는 하루 이틀이면 대리점에서 물건을 구했는데 요즘은 미리 현찰로 선금을 주고 기다리는 형편” 이라고 말했다.

안산공단의 전기업체인 P사는 “수입 부자재값이 1년전에 비해 85% 정도 올랐는데 공급업체들이 현금 구입은 물론 예약금까지 요구하고 있어 삼중고를 겪고 있다” 고 말했다.

◇ 주요 품목별 현황은 어떤가 =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가 철강원료인 고철 (古鐵) 과 LNG.나프타.원피.원면 등을 들 수 있다.

고철의 경우 주요 철강수입사들이 환율상승으로 인한 고철수입가 급등으로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이에 따라 철근제품 가격이 지난해 초에 비해 무려 30~40%이상 올랐다.

이에 따라 주요 수요업체인 건설사 등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원면의 경우 1월말 현재 재고량이 1만t으로 13일 물량에 불과하다.

전선 사정도 만만찮다.

원자재인 전기동과 알루미늄 가격이 최소한 50% 이상 오른 데다 수요업체의 구매물량 감소에 따라 가동률이 크게 낮아지고 있다.

L전선은 설 연휴기간인 지난달 27일부터 2월1일까지 공장가동을 중단했다.

사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유화제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1월말 현재 국내 원유.수입제품 재고는 67일분으로 지난해 12월말 (58일) 보다는 재고가 조금 늘었지만 가격은 껑충 뛴 반면 수요는 급감해 애를 먹고 있다.

이영렬·이원호·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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