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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그라민 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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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프리카 자문다 왕국의 아킴 왕자는 21세에 가출을 결심한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 대신 손수 신붓감을 골라볼 작정이었다. 행선지를 고심하던 그가 지도를 보다 환호한다. “그래, 여기야!” 다름 아닌 미국 뉴욕시의 퀸스(Queens)다. 에디 머피가 주연한 영화 ‘커밍 투 아메리카’(1988년)에서 관객의 웃음보를 터뜨린 장면이다. 왕비 후보가 넘쳐날 것 같던 이름과는 달리 왕자 눈에 비친 퀸스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서민 동네였다. 지금도 주민의 5분의 1 이상이 빈곤층이다. 특히 싱글맘 등 여성 가장이 많다.

방글라데시 은행가 무함마드 유누스가 지난해 초 퀸스에서 은행을 연 건 그래서였다. 지금껏 여성 600여 명에게 수백에서 수천 달러까지 150만 달러(약 19억원)를 빌려줬다. 그 돈으로 여성들은 빵 장사와 옷 가게를 벌이고, 화장품 방문판매를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 전 외신에 소개된 ‘그라민 아메리카’의 성공담이다. 유누스가 1983년 최빈국 방글라데시에서 창립한 소액대출은행 ‘그라민 뱅크’가 미국 땅에까지 발을 내디딘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코소보·잠비아·과테말라 등 그간 진출한 나라가 여럿이긴 해도 미국은 좀 의외다. 그러나 부자 나라라고 부자만 사는 건 아니다. 한 꺼풀 벗겨 보면 미국인 중 2800만 명이 은행 거래는 꿈도 못 꾸는 금융소외자다. 가난한 나라 은행 도움인들 마다할 처지가 아니다.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그라민 뱅크의 비즈니스 모델은 사실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 재산도 직업도 연줄도 없는, 그것도 주로 여자들에게 조건 없이 돈을 빌려준다. 그런데 상환율이 98%를 넘는다. 마중물 삼아 적은 돈을 대주면 빈민층도 자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싹이다. 흔히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소액대출은행 네트워크 ‘플래닛 파이낸스’를 세운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하지만 세상엔 물고기 낚는 법을 알아도 낚싯대가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우리 일은 이런 이들에게 낚싯대를 건네주는 것이다.”

경제 위기를 맞아 국내에도 금융소외자가 증가일로라 한다. 고리 사채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인 이들에게도 낚싯대를 쥐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끼리 할 수 없다면 ‘그라민 코리아’도 열어 달라 읍소해야 하려나.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