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하승진, 새 왕조를 수립할 것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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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스타 사령탑 허재 감독(오른쪽)과 2m21㎝의 거인 센터 하승진이 KCC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합작해냈다.

1일 열린 챔피언결정전 7차전을 마지막으로 프로농구 시즌이 끝났다. KCC가 우승했고, 삼성이 준우승했다.

이미 선수로서 두 차례 우승을 기록한 KCC의 허재(44) 감독은 지도자로서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의 우승은 발목 부상을 딛고 마지막까지 골밑을 지킨 하승진(24)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우승은 허재 감독과 하승진의 우승이다. 2m21㎝의 하승진을 활용한 KCC의 경기는 1997년 프로농구 출범 이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버전의 농구였다. 그 독특함과 압도적인 이미지 때문에 농구계 일각에서는 이번 우승을 실업농구 시대의 기아에 비견되는 ‘KCC 왕조’의 시작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농구대잔치가 가장 큰 대회였던 실업농구 시대의 기아는 무적이었다. 농구대잔치에서 무려 일곱 차례나 우승했다. 한기범-김유택-허재-강동희-김영만으로 이어지는 중앙대 출신의 알짜 멤버들은 고스란히 국가대표 베스트 5였다. 당시에 이미 기아는 프로농구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실업농구 초기를 양분한 현대나 삼성 모두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러면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KCC는 실업농구 시절의 기아처럼 오랫동안 코트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까. KCC 왕조는 가능한가. 전문가들은 KCC가 강력한 점은 인정하지만 왕조 수준에 이르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한다.

실업농구 기아의 마지막 감독이자 프로 기아의 첫 감독이었던 최인선(59) 엑스포츠 해설위원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KCC가 강하지만 나머지 9개 팀이 독주를 허용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KCC는 어렵게 우승했다. 동부와 삼성 모두 간신히 이기지 않았나. 왕조가 되려면 센터뿐 아니라 모든 포지션에서 강해야 한다. 하승진이 모든 면에서 발전하겠지만 그런 정통센터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벤치(코칭스태프와 후보선수)도 보강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선수 시절의 허재는 불굴의 파이터였다. 손이 부러지고 눈두덩이 터져도 포기할 줄 몰랐다. 사진은 기아에서 뛰던 1998년 현대와의 챔피언결정전.

젊은 해설자 석주일(36) MBC-ESPN 해설위원도 유보적인 입장이다. “KCC가 3년 또는 5년 정도 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기아처럼 장기간 강팀으로 군림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예상이다. 석 위원은 “KCC와 나머지 팀의 전력차가 크지 않다. 외국인 선수라는 변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프로농구계의 분위기가 KCC의 독주를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는 “KCC의 젊은 선수들이 플레이오프에서 선전했지만 세대교체가 끝난 것도 아니다”고 지적했다.
 
드라마 제조기 허재
허재라는 개인이 매력적인 점은 그가 만들어내는 드라마에 있다. 그는 선수 시절 세 차례 챔피언결정전을 경험했는데 두 번은 우승, 한 번은 준우승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큰 감동을 준 드라마는 공교롭게도 기아가 현대에 져 준우승에 그친 1998년에 나왔다.

선수 시절의 허재는 불굴의 파이터였다. 손이 부러지고 눈두덩이 터져도 포기할 줄 몰랐다. 사진은 기아에서 뛰던 1998년 현대와의 챔피언결정전.

당시 그는 오른쪽 손등의 뼈가 부러졌고 허리 부상도 겹쳤지만 눈부신 경기로 기아의 3승을 건져냈다. 특히 경기 중 눈두덩이 찢겨 피를 줄줄 흘리고, 거기 붕대를 겹쳐 댄 채 결승골을 빼낸 5차전은 역대 챔피언결정전 경기 가운데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기아는 7차전에서 패해 준우승에 그치는데, 허재는 우승팀에서 MVP가 나오는 전례를 깨고 이 상을 수상했다. 그는 “대단히 감사하지만 팀이 졌기 때문에 기쁘지 않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경기장을 떠났다.

한 해 전인 97년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최인선 감독과의 갈등 때문에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허재가 아픈 곳도 없으면서 결승전을 벤치에 앉아 지켜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중앙대 후배 정회조를 어깨동무하고 지루한 시간을 견뎠다. 팀은 우승했지만 허재는 기아를 떠날 생각을 했다. 이해의 MVP는 허재에게 가려 ‘만년 2인자’ 소리를 듣던 강동희(현재 동부 감독)였다.

98년 원주를 연고지로 하는 나래(TG를 거쳐 현재는 동부)로 이적한 허재는 2003년 오리온스와의 챔피언결정전에 출전했다. 그러나 5차전에서 갈비뼈를 다쳐 6차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팀은 4승2패로 우승했지만 허재는 승부가 거의 결정된 경기 종료 직전 경기장에 투입됐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으나 성취욕으로 가득한 허재가 흡족했을 리 없다. 이렇게 볼 때 선수로서의 허재는 챔피언결정전에 관한 한 운이 없었다.

감독으로서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많은 미디어가 허재 감독의 승리를 ‘첫 우승’이라고 표현했다. 앞으로도 우승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하승진이 있어 KCC가 강한 전력을 보유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어느 정도 인정받은 듯하다. 그의 경기 운영은 특히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에서 경기를 거듭할수록 향상됐다. 7차전에서는 삼성 안준호(53) 감독의 승부수를 대부분 무력화시켜 일방적인 승리로 몰고가는 데 성공했다.
 
성장하는 거인 하승진
경기를 할수록 기량이 늘었다. 그리고 이름값을 하겠다는 의지가 투철했다. 몸이 큰 선수들의 의지가 약하다는 통념은 이미 서장훈과 김주성이 깨버렸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챔피언결정전에서 발목 부상은 하승진에게 뭔가 변명거리가 될 만도 했는데, 그는 부상을 핑계 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프지 않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냈다. 그의 이 투지가 동료에게는 용기를 줬고 삼성에는 근심거리가 됐다. 삼성은 작전의 절반을 하승진에 대비해 짜야 했다.

운도 좋았다. 삼성이 하승진에 대항하는 방식은 아주 상투적이었다. 삼성의 테렌스 레더(2m)는 하승진의 수비가 부담스러워 장기인 골밑 공격 대신 점프슛을 자주 던졌다. 전반엔 성공률이 높았지만 체력이 떨어진 후반에는 쉽지 않았고, 리바운드는 KCC 몫이 됐다. 삼성은 레더가 공격하지 않을 경우 3점슛에 의존했는데, 이 방법 역시 일곱 경기 중 네 경기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삼성은 한국 남자농구가 국제대회에서 중국에 패할 때 되풀이하는 방식으로 KCC를 상대했고, 결과도 전례를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3승을 건진 게 용했다.

하승진은 한국인 최초의 미국프로농구(NBA) 선수다. 2004년 포틀랜드에 지명돼 빅리그를 밟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와 지난해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KCC에 지명됐다. 비록 미국에서 실패했지만 농구인 아버지(전 국가대표 하동기)를 둔 그의 재능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장훈(35·2m7㎝)이 하승진이 입단한 뒤 출전시간이 준 데 불만을 품고 항명했을 때 KCC가 쉽게 전자랜드로 그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하승진의 잠재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승진은 구단의 신뢰에 100% 부응했다.

물론 어린 티도 냈다. 1월 15일 KT&G와의 경기에서 하승진은 겨우 7분14초를 뛰었을 뿐이다. 하승진은 “팀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30초 뛰고 슛 하나 못 넣으면 빼고, 수비 못하면 빼고…”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런 점은 체력이 바닥나고 손이 부러져도 출전을 원했던 ‘승부욕의 화신’ 허재 감독을 닮았다.

하승진의 기량은 다음 시즌 더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올해만큼 강한 임팩트를 느끼게 할지는 알 수 없다. 이번 시즌 하승진은 심판 판정 면에서 ‘과보호’를 받은 면이 없지 않다. 하승진을 수비하는 선수들이 모두 파울작전을 사용할 것이라는 심판들의 선입견 때문일까. 아니면 전도유망한 선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뜻에서였을까. 심판들의 판정은 하승진(따라서 KCC)에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느린 재생화면을 보면 파울이라고 보기 어려운 장면에서 휘슬을 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도 이런 대접을 받을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부정확한 ‘짐작’ 판정이 계속된다면 하승진이나 한국 농구로 봐서도 좋을 게 없다. 지난 시즌 하승진을 수비한 선수들이 선언당한 파울 가운데는 NBA 같았으면 불리지 않았을 경우가 많았다. 국제대회에서도 심판들이 우호적인 판정을 해줄 리 없다. KCC와 하승진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허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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