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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난장 1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습기 밴 바닷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며 등골이 쓰리도록 차가워졌다.

그러나 겨울바람은 낡은 육체에 신선한 쾌감을 안겨주는 마약 같은 기운이 스며 있었다.

두 사람은 회색빛 저녁 이내가 깔리고 있는 방파제길을 되돌아 영동식당으로 찾아들었다.

술청 안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석유난로가 혼자 타고 있었다.

철규는 자신이 유숙하고 있는 방을 성민에게 보여 주었다.

탐탁찮은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지만, 성민은 말이 없었다.

한동안 난로를 쬐고 앉았으려니, 어판장으로 찬거리를 사러 나갔던 승희가 돌아왔다.

그녀가 들고 온 양재기에는 갓 잡힌 명태 몇 마리가 담겨 있었다.

“방파제로 나가는 두 분을 보았거든요.” 명태를 도마 위로 올리며 승희가 한 말이었다.

강성민의 시선이 도마질을 하고 있는 승희의 이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요즘 같이 등골이 오싹한 경제한파에 아주머닌 석유를 안심하고 태우시네요?” “두 분이 언제 들어오실지 몰라서 피워 둔 채로 나갔어요.” 강성민의 눈길이 이번엔 철규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철규는 무표정이었다.

잠깐 사이에 명태찌개 한 그릇이 식탁으로 올라왔다.

소주는 철규 손수 주방의 진열대에서 꺼내왔다.

그 찰나에 술청의 문이 열리면서 가자미 한 꿰미를 손에 든 변씨가 들어섰다.

그가 뒤따라 올 것을 철규는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방파제를 벗어난 모퉁이길 건어물 가게 안에 웅크리고 서서 두 사람의 거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변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철규가 반기는 눈치를 보이자, 변씨는 아무런 거리낌도 두지 않고 덥썩 의자를 끌어 당겨 합석했다.

강성민이 꺼림칙해 할 겨를을 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인사부터 시켰다.

그러자 변씨는, 그럼 그렇지 하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러면, 강선생 직업이 환쟁이란 말이지요? 서울서도 내로라 한다는 환쟁이들이 요즘 같은 엄동설한에도 딸 같은 영계들을 끼고 가끔 찾아 옵디다.

그런데 도착한 첫날부터 가는 날까지 도대체 그림은 좆도 안 그리고 자연산 광어회에 양소주만 질탕하게 퍼마시다 훌쩍 떠나버립디다.

강선생도 그림 그리러 왔소?” 걸레를 입에 물고 다니는 것 같은 변씨의 걸찍하고 거침없는 비아냥거림에 날벼락을 맞은 강성민은 대꾸는 않고 변씨에게 술잔만 내밀었다.

다행스럽게도 승희가 주방의 조리대와 식탁을 들락거리며, 변씨에게 쉴새없이 눈짓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 험구 (險口)에서 더 이상의 똥걸레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청 안은 몰려든 술꾼들과 비린내 나는 연기와 식탁을 때려가며 목청껏 뽑아 올리는 잡담으로 가득 찼다.

눈자위가 게게하니 풀어졌던 변씨도 어느새 다른 식탁으로 옮겨 가고 없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도 그런 난삽한 분위기에 휩쓸려 들면서, 한 켜 한 켜 긴장감이 흩어지고 있었다.

삶에 대한 통찰력이나,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의구심과 배신감, 그리고 그들이 껴안고 있는 시간의 유적감 (流謫感) 같은 농축된 언어들이 갖는 수사적 (修辭的) 중량감이 어느덧 무의미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몸 전체로 확산되는 도도한 취기를 즐기면서 게으름 피우지 않고 독한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시종 오만하고 무뚝뚝한 표정이었던 강성민의 눈 가장자리에 배어 나온 눈물자국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구닥다리이긴 후배도 마찬가지군.” “선배…, 어떻게 할 거요?” 그 순간, 한철규는 자신이 앉아 있는 낡은 의자가 안락하게 느껴졌다.

배습기가 작동되고 있었으므로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방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이 순간이 더없이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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