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대량실업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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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국 작가 H G 웰스가 '타임 머신' 이란 가상 (假想) 소설을 발표한 것은 지금부터 꼭 1백년 전인 19세기 말이었다.

모든 산업분야에 경이로운 신기술이 도입되면서 노동력이 점차 감소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80만년 후의 미래세계를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에는 일자리란 것이 아예 없는, 그래서 아무도 일할 필요가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것은 '옐로이' 라는 종족이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아하고 나태한 생활만을 즐기며 살아간다.

얼마후 주인공은 그들과 유리된 지하세계에는 '몰로크' 라는 노예들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은 옐로이족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한다.

일하는 것을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던 몰로크족은 옐로이족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처절한 복수를 시작한다.

굶주리게 되자 연하고 방어력이 전혀 없는 옐로이족들을 가축처럼 잡아먹는 것이다.

'타임 머신' 속의 이 대목은 바로 극소수의 근로자들이 절대다수의 무직자와 실업자를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다.

실업률이 두 자릿수를 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이 종종 이 소설을 인용하는 것도 그런 상황이 가정 (假定) 일 수만은 없다는데 근거한다.

실업률이 영구적으로 지속되리라는 전제하에 학자들이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모든 가치판단을 초월하는 '니체식 (式) 허무주의' 가 팽배하리라는 것이다.

노동.돈.자긍심.명예, 심지어 가치관에 대한 기존개념조차 완전히 뒤엎어 버리리라는 끔찍한 결론이다.

모든 산업국가에서 열심히 일에만 매달려 온 근로자들의 한결같은 '꿈' 은 '풍요로운 사회' 였다.

하지만 풍요의 상징처럼 생각돼 오던 과학화.정보화 시대가 오히려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현실을 전세계의 근로자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요즘 우리 사회를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는 대량실업 사태는 그에 비할 바 없이 더욱 절실하다.

지금의 우리 현실은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진행이 시작된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코 앞에 닥친 오늘의 문제다.

과연 누가 적자 (適者) 냐는 문제일 뿐이니 '니체식 허무주의' 도 우리에게는 사치일는지 모른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도무지 가슴을 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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