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다시 한번 해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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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새해를 맞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일 뿐' 이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 취임사에 나오는 명구를 생각하게 된다.

이 명구는 25%에 달하는 실업률과 1천3백만명에 이른 실업자, 거의 반으로 줄어든 산업생산과 국민소득, 거의 모든 은행이 폐쇄된 대공황 속에서 좌절과 실의에 빠진 미국민들이 자신감을 되찾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의 우리 경제상황을 1930년대초 미국이 경험한 사상 초유의 대공황에 물론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값진 노력으로 이룩해낸 한강의 기적이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갑자기 산산조각나는 듯한 놀라운 현실에 접한 우리 국민 모두가 느끼는 분노와 좌절감의 강도조차 비교할 수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현재 우리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외환.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세계화시대에 우뚝 선 선진 한국경제로 재도약하는 데 필요한 기틀 마련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할 때 우선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은행을 포함하는 부실금융기관 폐쇄와 합병,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기업과 금융기관의 소유와 지배,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계열기업의 결합재무제표 작성, 적대적 인수.합병 (M&A) 의 허용, 정리해고제 조기 도입 등 어느 것 하나 두려움이 앞서지 않는 것이 없다.

바로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머뭇거렸고 경제구조 조정에 필요한 변화와 개혁을 미뤄왔다.

우리는 지난 몇년 동안 세계화의 참뜻과 세계화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도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화라는 구호만 외쳐 왔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국경없는 경제, 무한경쟁을 뜻하는 세계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무엇을 해 왔던가를 짚어보면 곧 알 수 있다.

금융의 세계화 추세가 가속화하면서 세계 외환시장의 하루 거래량이 1조달러를 상회한 지 오래인데, 불과 몇백억달러 남짓한 외환보유고마저 제대로 챙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환시장 기반 조성과 유사시에 활용할 수 있는 국제협력체제 마련을 위해 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우리 기업들은 전문화와 기업능률 향상을 위한 각종 기업구조 개선의 세계적 추세를 외면한 채 차입 위주의 무작정한 기업 확장과 전 (前) 세계화시대적 선단식 경영에 집착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릴 겨를이 없다.

우리 스스로 '외압에 의한 경제구조 조정' 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경제의 구조개혁작업을 우리 스스로를 위해 두려움 없이 적극 추진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1990년대초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시작된 금융위기와 경기침체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경제는 부실금융기관 정리를 포함하는 금융구조개편을 과감하고 신속히 추진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요즘 일본의 일부 식자들간에는 국제통화기금 (IMF) 긴급구제금융을 받게 된 한국을 부러워한다는 농담이 오간다는 것이다.

이 농담은 우리가 당면한 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경제구조 조정에 성공한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국가경쟁력 면에서 일본을 능가할 수 있다는 중요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우리는 단 1세대 동안에 당시 국제사회에서 아무도 해내리라고 믿지 않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냈다.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제2 한강의 기적을 다시 이룩해낼 수 있는 저력을 우리는 분명히 갖고 있다.

다만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향해 온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할 수 있는 설득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리더십의 출현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곧 출범할 새 정부에 거는 우리 국민 모두의 기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크다.

사공일<세계경제硏 이사장>

◇ 필자 약력 ▷58세▷서울대 상대 졸.美 UCLA 경제학박사▷뉴욕대 교수▷KDI 부원장▷산업연구원장▷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재무장관▷IMF 특별고문▷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현) ▷저서 '세계 속의 한국경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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