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가 보는 21세기 의료]2.DNA가 지배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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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과학은 선악과 관계없이 항상 승리한다.

윤리와 도덕은 과학의 성과를 비난할 수 있지만 기술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다.' 2007년 3월. K박사는 '복제양 돌리 탄생 10주년 기념식' 에 참석하고 돌아오면서 생명공학의 빠른 변화를 우려하는 주제발표자의 말을 떠올렸다.

실로 의학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에도 과학자들이 원하는 대로 발전하고 있었다.

재작년 (2005년) 인류의 숙원인 인체게놈 사업이 완결됐을 때 모든 언론은 "DNA가 말하기 시작했다" 고 앞다투어 보도했다.

10만 개의 유전자와 30억 개의 유전정보가 완전히 해독되어 인류탄생의 신비와 3천여 종류의 유전질환, 그리고 현대의학이 봉착하고 있는 불치병의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장은 희망적인 면보다는 걱정스러운 사회현상으로 나타났다.

의학은 오히려 암울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유전자가 해독된다고 해서 당장 치료법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적어도 10년 이상은 기다려야 유전자를 이용한 진단 및 치료법이 개발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때까지 세상은 오히려 유전자 해독에 의한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가문을 따지는 집안에서는 결혼상대자에게 예물보다 DNA보증서를 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반려자에게 알콜중독이나 폭력.도박을 즐기는 유전인자가 잠재해 있다면 사랑이 식을만하지 않겠는가.

또 40대에 대장암이나 심장병 등 치명적인 병에 걸릴 유전적 소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을 허용할 부모가 있을까. 게놈프로젝트 파장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후보를 비방하는 흑색선전용으로 이용될 조짐도 보였다.

보험회사에선 가입자에게, 일부 기업에선 특수업무를 맡을 신입사원에게 유전자 건강진단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인체게놈프로젝트 완성과 함께 유전자 생체 이식술의 발전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얼마전 돌연변이된 유전자를 복제에 잘못 사용했다가 기형아를 만들었던 사건은 K박사가 바라고 있는 복제인간 법제화추진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돌리가 탄생한 20세기말 그는 '베이비클론' 이라는 연구소를 차렸다.

남편의 정자생산이 불가능한 부부를 위한다는 것이 이 연구소를 설립한 명분이었다.

유전자 생체이식술을 이용해 자녀를 갖는 것은 이제 CD를 찍어내는 것처럼 쉬워졌다.

남편의 피부세포에서 유전정보를 담은 DNA를 분리해 낸 뒤 이를 아내의 난자에 주입 (일종의 수정) 하고, 다시 자궁에 이식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복제인간의 생산 (?) 은 엄격히 규제되고 있다.

불임부부들은 개인의 행복권을 주장하며 끈질기게 법의 개정을 요구했고, 일부에서는 이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에서 임신을 해 오는 사례도 생겨났다.

결국 정부는 불임부부에 한해 조건부 허용의사를 비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전질환을 가진 부부와 결혼을 원치 않는 사이버섹스족들이 복제베이비를 원했다.

이들은 살을 맞대는 섹스를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쾌감과 생식이 목적이라면 이를 과학적으로 해결한 지금 극심한 노동과 지저분한 (?) 분비물을 교환해야하는 과거의 섹스행위는 얼마나 원시적인가.

유전자연구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사실 1952년 미국 로버트 브릭스박사팀이 올챙이의 세포로 개구리를 복제하고, 85년 인간의 성장호르몬을 생산하는 돼지가 탄생했을 때만해도, 더 나아가 93년 영화 쥬라기 공원이 유전자조작의 파괴력을 경고했을 때 왜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원초적 질문에 대한 답은 '유전자 덩어리' 라는 것이다.

사랑과 우정, 예술가의 번뜩이는 창조력, 인간의 아름다운 고뇌도 모두 유전적으로 해석되고, 비범한 재능과 수명.건강까지도 유전자로 조작되는 시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더 완벽한 유전자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연구실로 들어온 K박사는 인간회복운동가가 보낸 서신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거기에는 '당신의 인간복제가 사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체조직과 유전자가 상품화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경고 글귀가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고종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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