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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의술 도입한 ‘친한파’ 알렌 대한제국은 활용할 힘조차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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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대한제국 최후의 미국공사 알렌(H N Allen). 1884년 가을 의료선교사로 이 땅을 밟은 지 몇 달 안 돼 터진 갑신정변은 그에게 왕실로 오르는 사닥다리를 놓아 주었다. 칼날에 베인 살점과 끊어진 핏줄을 꿰매고 이어주는 신묘한 의술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되살린 덕에 어의(御醫)에 올랐으며, 이듬해 4월에는 근대병원 광혜원을 세우고 개신교 포교의 길도 넓힐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1890∼1893), 임시대리공사(1893∼1897), 전권공사(1897∼1905) 등을 거치며 조선왕조와 영욕을 함께했다. 그때 그는 왕실의 신임을 바탕으로 기독교 전교와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 금광 채굴권을 얻어낸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이기도 했지만, 중국·러시아·일본 패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조선 지키기에 온 힘을 다한 ‘조선 독립의 옹호자’이기도 했다. 침략의 창과 수호의 방패를 함께 잡은 탓에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로 다가선다. 그러나 그가 조선의 독립이라는 줄에다 미국의 이익이란 구슬을 꿰어나가려 한 보기 드문 친한파 인사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러시아가 만주를 손아귀에 넣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만주 지역 진출에 빨간불이 켜진 것으로 보아 반러·친일 쪽으로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를 잡았다. 그러나 1903년 알렌은 루스벨트를 향해 “영국과 일본의 이익을 위해 화덕에 있는 밤을 집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정면으로 맞섰다. “일본이 계속 커나가면 태평양 지역 상업을 모두 지배하려 할 것이며, 세계무역에서 미국에 맞설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 그는 일본이 미국의 적국으로 떠오를 것을 정확히 짚어낼 만큼 혜안을 가졌지만, 나라의 정책 기조를 바꿀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1903년 초 그는 본국으로 떠나기 전 부인과 서기관 패독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남겼다. 한 계단 아래에 내려선 오른쪽 6척 장신이 알렌이다(사진).

1905년 1월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에게 일격도 가하지 못하는 한국인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중재에 나설 수는 없다”며 루스벨트는 조미수호조약에 명시된 거중조정의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그해 7월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필리핀과 조선을 맞바꿨다. 북한 핵과 미사일로 동아시아 정세가 요동치는 오늘. 스스로를 지킬 힘과 함께 우리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 줄 역량 있는 미국 내 세력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실패의 역사에서 배울 교훈이 아닐까.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