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국인에게 고함]2.자신감부터 추스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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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럽 여행 도중 김대중 (金大中)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또 유럽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한국 경제위기에 대한 소식도 함께 들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개의 사건이 동시에 겹쳐 일어난 것이다.

필자는 金당선자와 한국이 미국 역사와 일본의 경험에서 대담한 교훈을 끌어내 주었으면 한다.

金후보 당선 뉴스를 듣고 1932년 가을 미국이 금융공황의 한복판에 빠졌을 때 야당후보였던 F D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선출됐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 미국은 3년 이상에 걸친 대공황으로 국민총생산 (GNP) 규모가 절반수준으로 떨어졌고 은행도산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우리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바로 우리속에 자리잡은 두려움 뿐" 이라고 역설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이나, 그리고 일본에도 가장 적합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루스벨트가 지적한 것은 기업가와 소비자 개인의 컨피던스 (신뢰감) 문제였다.

이는 일부 경제학자들에 의해 '비즈니스 컨피던스 학설' 로까지 발전했다.

이는 사람들의 심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다루기는 어렵지만 호황이나 불황에서 주가.환율.생산 등이 단기간에 수십~수백%씩 오르거나 내리게 하는 투기와 경제붕괴 현상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

이런 경제현상은 심리적 요인을 빠뜨린 채 단순히 경제수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낙관.비관같은 심리요인에 의한 진폭의 크기를 정책이나 설득에 의해 상당부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는 80년 이후 신흥공업국의 선두에 서서 중앙집권체제 아래 맹렬한 속도로 질주해 왔다.

그러나 결국 강력한 심리적 요인과 낙관주의 때문에 너무 멀리 나간 나머지 한국 경제는 과잉투자 등 실물경제에서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고 지금 대규모적인 구조조정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초창기에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고 이번 동남아시아의 금융위기에서도 이런 특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내외에 걸쳐 자기실력 이상으로 벌여놓은 전선 (前線) 을 한번은 전면적으로 재편, 정리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한국이 너무 장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맹한 한국 경제가 이번의 금융위기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과 김대중당선자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할 것인가.

우선 무엇보다 경제주체들의 신뢰회복이 중요하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음 1백일간' 에 이어 2년동안 계속해 경제사회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신뢰를 회복했고 결국 1937년에는 미국의 경제지표를 대공황 전인 1929년 수준으로 되돌려 놓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있지만 본인은 그의 노동개혁과 사회개혁이 산업계의 반발을 불러 '비즈니스 컨피던스' 를 약하게 만든 결과 투자수준이 낮아진 것이 오히려 경기회복을 더디게 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지적은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지만 한국도 꼭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거품붕괴 이후 90년대 일본경제에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거품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기업.증권회사 총회꾼과의 유착 등 어두운 부분을 도려내는 절개수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불안심리에 오히려 박차를 가한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한국 금융위기는 무역적자와 대외채무의 누적이 외국금융기관의 대한 (對韓) 신용 저하를 불러일으킨 면이 크기 때문에 금융시장의 투명화 등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수개월간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브리지론 (임시융자) 의 확보이지, 한국의 지불능력 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 경제사회는 역시 세계 대불황의 교훈으로부터 국제협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제통화기금 (IMF).세계은행 (IBRD).서방선진7개국 (G7) 이 중심이 돼 한국과 동남아시아가 직면한 브리지론 부족을 메워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IMF 등이 요구하듯 부실금융기관과 과잉인원의 정리.시장원리의 투명화 등을 성급하게 재촉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국내외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므로 오히려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내에서도 경제주체들의 불안감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이 최우선적으로 요구될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고용유지에 적극 노력하는 대신 노동자측도 근로조건 개선요구를 일정기간 유보시키는 '국민적 합의' 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金당선자는 건강만 허락한다면 이러한 어려운 시대의 한국 지도자로서 적임이라고 생각된다.

아보 데쓰오<安保哲夫.도쿄대 교수>

<약력>

▶1937년 평양 출생

▶도쿄 (東京) 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84년)

▶73년~현재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국제경제.일본기업 국제화 전문)

▶주요저서 : '아시아 기업의 국제경쟁력' (미 맥밀란사 출판) , '혼혈 (Hybrid) 공장 : 일본의 미국현지기업' (옥스퍼드대 출판부) , '1차대전~2차대전중 미국의 해외투자' (도쿄대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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