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시시각각

인플레의 치명적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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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난 3월 미국과 영국은 신용경색을 풀기 위해 금리를 사실상 0%까지 내렸으나 그래도 돈이 돌지 않자 마침내 양적 완화(量的 緩和)정책을 꺼내 들었다. 양적 완화란 고상한 말은 실은 중앙은행이 직접 시장에 돈을 퍼붓는다는 뜻이다. 평소 같으면 통화가치 안정과 인플레 방지를 사명으로 하는 중앙은행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조치다. 그러나 지금이 어디 평상시인가. 경제가 결딴나기 전에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다 쓰겠다는데야 중앙은행의 사명 따위가 무슨 대수겠는가. 디플레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중앙은행들은 이제 평생 원수인 인플레를 자발적으로 끌어들이기에 이르렀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돈의 양을 늘리는 것이라면 재정정책은 고여 있는 돈을 인위적으로 돌리는 정책이다. 경기침체로 위축된 민간의 투자와 소비를 정부가 대신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돈을 어디서 조달하느냐다. 경기침체기에 정부가 돈을 더 쓰려면 빚을 지는 수밖에 없다. 재정지출의 확대는 결국 재정적자의 확대로 귀착된다. 그러나 한번 늘어난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마련이고 원금은커녕 이자 갚기도 버거워진다. 급기야 이자를 갚기 위해 새로 빚을 내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인플레 정책을 쓰고 싶은 유혹이 슬며시 일어나는 순간이다.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물타기를 함으로써 상환부담을 덜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1920년대의 독일이나 1980년대 남미, 금세기 초 짐바브웨에서 벌어진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지경까지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정부 부채가 늘어나면 그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정부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인 미국과 영국에선 벌써 인플레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 『맨큐의 경제학』으로 잘 알려진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 정부더러 경기회복을 위해서는 아예 인플레 정책을 적극적으로 쓰라고 권하고 나섰다. 작금의 경기침체는 수요부족에 기인한 것이므로 더 금리를 낮추면 기업과 가계가 차입을 늘릴 것이고 그 돈으로 투자와 소비를 늘리면 고용도 늘어날 것이란 얘기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에 다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그는 교과서 밖으로 한 발 더 나갔다. 이미 명목금리를 0%로 낮춰 금리를 더 내릴 수 없다지만 인플레를 조장하면 실질금리를 마이너스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실업률 상승이나 재정 적자보다는 차라리 인플레를 택하는 편이 낫다는 얘기다.

그러나 맨큐의 제안에는 함정이 있다. 인플레를 유발하면 투자와 소비가 늘어난다는 교과서적 가정이 현실과 엇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인하와 재정지출 확대로 시중에 넘쳐나는 돈은 투자와 소비로 가질 않고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인플레 정책이 실물경기를 부추기는 대신 자산시장의 거품만 키우는 꼴이다. 이 거품이 장차 실물경기의 회복시점까지 부풀어 오른다면 자칫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을 우려가 크다. 기껏 경기를 살려놓았더니 인플레로 다 까먹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행이 최근 잇따라 기준금리를 동결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은 중앙은행의 본분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레닌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플레로) 그 통화를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인플레의 위험성은 디플레 못지않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