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영정, 절대 진리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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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34면

새로운 지폐가 생긴다. 작금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인지 새로운 지폐에 거는 기대 또한 적지 않다. 게다가 새 돈은 최고 액면가인 5만원권이지 않은가. 새 지폐와 더불어 우리 경제에 웃음꽃이 활짝 피기를 기원한다. 그런데 새 지폐가 초상화 문제로 구설에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사임당 초상화 논란에 부쳐

새 지폐의 인물은 바로 신사임당. 여성이 지폐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것도 초유의 일이다. 그런데 ‘지폐의 신사임당 모습이 표준 영정과 다르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측도 있는 모양이다. 표준 영정의 얼굴은 길쭉한데, 지폐 영정의 얼굴은 둥글다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 심지어 지폐 영정이 이상화된 한국 여성상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신사임당은 고결한 인품과 덕성, 그리고 천부적 재능의 예술가상을 지닌 매력적인 여성으로 표현돼야 한단다. 더불어 시선 방향이나 얼굴 표현의 지엽적인 문제를 침소봉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측도 있는 모양이다. 지폐 디자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원화(原畵)와의 차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다.

표준 영정이란 무엇인가. 정부는 역사상 중요 인물을 선정해 그 얼굴 모습을 ‘표준’으로 제시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대상 인물과 동시대인이 제작한 초상화가 현존한다면 마땅히 그 작품을 표준 영정으로 지정한다. 하지만 대다수 표준 영정은 ‘상상의 산물’이다. 사진술이 부재했던 19세기 이전 인물의 경우 냉정하게 표현해 실제 모습을 100% 담보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추정’ 인물 모습의 난맥상을 정리하고자 ‘편의상’ 제정한 것이 표준 영정이다. 한마디로 표준 영정은 절대적 진리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하나의 약속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회화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초상화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고려 불화의 전통과 조선왕조의 보학(譜學)을 중시한 문중 의식의 발달은 독자적 초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다. 핍진하다는 표현은 곧 초상화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주인공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틀리지 않게 외형을 묘사한 사실정신은 찬란하다.

오늘날의 의학자가 옛 초상화를 보고 병력(病歷)을 진찰할 수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의 일은 아니리라. 그렇다고 조선 초상화가 겉모습만 닮게 그리려 하지도 않았다. 주인공의 내면세계까지 진솔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초상화를 두고 전신(傳神) 기법의 극치라고 상찬하는 것이다. 초상화의 전통은 대상 인물을 이상화하여 꾸미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여성적 매력 운운은 초상화 제작의 목표와 거리가 멀다. 초상화 전통 속의 사실정신을 망각한 시비는 하나의 소모전에 불과하다.

5만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초상은 일랑 이종상 화백의 작품이다. 신사임당의 표준 영정은 이당 김은호의 작품이다. 후자의 작품은 역사적 고증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 이른바 표준 영정 제작 시기 이후 역사학계는 복식과 여성 관련 사료를 다수 발견해 지견(知見)을 넓힌 면도 있다. 더불어 이 자리에서 심각하게 고려할 점이 있다. 표준 영정 작가의 친일 행적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차제에 신사임당 표준 영정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 친일파 작가에 의해 제작된 표준 영정과 기념 동상의 불행을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김은호가 그린 신사임당의 얼굴에 가득 찬 수심 어린 그늘, 그것은 과연 우리 시대의 그늘인가. 새 지폐의 신사임당 초상은 결코 친일 화가의 그늘진 표준 영정이 기준이 될 수 없다. 표준 영정은 학문적 고증과 예술적 상상력에 의한 하나의 ‘약속’에 불과하다. 약속은 정당할 때 효력을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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