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뷰]'변검'…가면인생들의 훈훈한 체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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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만유인력에 의해 세상의 모든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듯 정 (情) 은 인간과 인간을 끈끈하게 맺어주는 힘이다.

정 중에 최고는 누군가 시련이나 역경을 겪을 때 그와 함께 하는 마음이다.

쓸쓸한 세밑에 마음을 훈훈하게 덥힐 중국의 가족용 영화 '변검 (變검)' 이 다가온다.

가면을 바꾼다는 뜻의 '변검' 은 중국 스촨 (四川) 지역의 전통극에서 구사하는 기예 (技藝) 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 변검술은 '패왕별희' 를 통해 우리에게도 낯익은 '경극' 에 밀려 중국 거리의 곡예단에서나 잔존하고 있다.

순식간에 가면을 바꿔 다양한 인물을 재현하는 놀라운 비법으로 평생을 살아온 노인. 그리고 부모도 모른 채 이리저리 팔려다니다 노인을 만나게 되는 불우한 꼬마. 이들 사이의 정이 '변검' 의 주제다.

변검술의 계승자는 꼭 사내아이여야 한다는게 중국의 인습이다.

노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얼굴을 바꿀 수 있어도 이러한 생각의 지평은 바꿀 수 없다.

노인은 아이를 수제자로 키울 생각이었지만 그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얼굴을 사내로 바꾼 계집아이였다.

상심한 노인은 소녀를 버리려 하지만 이미 쌓인 정 때문에 소녀를 인격체가 아닌 애완원숭이같은 존재로 여기며 같이 산다.

그들의 집은 진경산수화에 흔히 나오는 매혹적인 중국 강호에 덩그러니 떠있는 일엽편주 (一葉片舟) .소녀는 실수로 배에 불을 놓게 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유괴된 사내아이를 구출해서 노인에게 바친다.

영화중에 소개되는 중국의 경극 '관음득도' 는 이러한 내용과 평행된다.

절벽에서 줄에 매달려 누명쓴 아버지의 억울함을 죽음으로 호소하는 효녀의 모습은 우리의 '심청전' 처럼 애끓는 감동을 던진다.

이 '관음득도' 에서처럼 유괴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된 노인을 위해 어린이는 몸을 던져 억울함을 호소한다.

노인을 구한 어린이는 비로소 애완용에서 인격체로 올라선다.

변검술을 익힐수 있게 된 것이다.

인습의 벽을 뛰어 넘어 여자가 남자와 같은 '사람' 이 되고 거리의 변검술이 경극 못지않은 전통의 유산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노인과 꼬마의 깊은 정 덕택이다.

그 인간적 정이 쌓여나가고 정을 끊는 것이 생명을 끊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준다는 동서고금 고전의 메시지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의 아픈 근대사의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노예처럼 시장에 내다 팔렸다든가, 뿌리깊은 남아선호, 중국 전통극에 관한 사전 지식은 그다지 필요없다.

이 꼬마연기자는 실제로 중국의 거리 곡예단에서 캐스팅되어 자신의 삶과 다름없는 이야기를 연기해냈다.

순진무구해야 할 나이에 세파를 헤치며 애절하게 정을 갈구하는 꼬마의 얼굴이 가슴 찡한 여운을 남긴다.

중국적 전통과 대륙의 창의력을 다시한번 유감없이 발휘한 '변검' 의 감독 우쳰밍 (吳天明.58) 의 삶도 영화내용과 연결된다.

중국영화를 세계화시킨 이른바 제5세대 감독들의 선배이자 스승인 4세대 감독인 그는 87년 반사회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자 미국으로 옮겨간다.

미국에서 쓸쓸히 비디오가게 주인으로 여생을 보내던 대가에게 95년 뒤늦게 던져진 시나리오가 '변검' 이었다.

영화의 노인에게 우 감독의 심정이 이입되었음에 틀림없다.

영화를 통해 고전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점은 그의 직계 후배라고 할 수있는 첸카이거 (陳歌凱)가 '패왕별희' 를 통해 세계에 먼저 보여주었으니 그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도 정이 흘렀으리라. 25일 호암아트홀 개봉.

채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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