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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교수 방북인상기]상.평양의 문화유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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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3권) 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 땅의 자연과 민족문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유홍준 (兪弘濬) 영남대 교수가 지난 9월23일~10월4일 12일 동안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북한 문화유산 조사단' 의 일원으로 북한에 다녀왔다.

본격답사를 앞두고 사전 실무협의를 위해 파견된 1차 방북기간중 兪교수는 평양 인근과 평안북도 묘향산 지구의 각종 문화유산을 둘러볼 수 있었다.

중앙일보는 새해부터 兪교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를 연재한다.

이에 앞서 그의 '방북 인상기' 를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여 러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분단 50년사의 한 점을 찍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 북한 방문 허가증을 교부받기 위해 통일원 관계자를 만났을 때 들은 첫 이야기다.

그리고 9월23일 평양에 도착해 북한의 실무자들과 첫 동석식사를 가졌을 때 그쪽의 실무대표격인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담당 참사는 우리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여러분은 이제 역사에 남을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부디 통일에 도움이 되는 글을 써주십시오. " 나는 이 두 말이 갖는 무게와 크기를 아직도 가늠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명과 부담을 조금도 체감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내가 정말로 북녘땅을 밟아보고, 그곳의 문화유산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들이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학습하며 즐기는가를 확인해 그것을 남쪽의 동포들에게 전해주는 것만으로 내 임무를 다할 수 있다는 생각 뿐이다.

그래서 내가 남이건, 북이건 관계자들에게 대답한 것은 똑같은 한마디의 말이었다.

"나는 있는대로 보고, 느낀대로 쓸 것입니다.

" 베이징 (北京) 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비로소 북녘땅으로 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지난 2년간 세차례나 방북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평양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북한방문을 믿지 않게 됐다.

그런데 내가 진짜로 고려항공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긴장인지, 감격인지, 흥분인지 내 숨소리를 내 귀로 역력히 들으면서 걸상띠 (안전띠) 를 맸을 때 고음 (高音) 의 맑은 목소리를 가진 여자 승무원이 힘있는 평양말씨로 안내 방송을 했다.

"JS152 승무원은 리용객 여러분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평양까지 비행거리는 1만㎞, 비행시간은 1시간30분을 예견합니다.

승무원의 방조 (도움)가 필요하신 분은 머리 위의 금단추를 눌러주십시오. 평양의 지금 기온은 20도이고 날은 개었습니다.

" 안내방송이 끝나자 이내 분홍빛 얼굴 화장에서 화사한 향토색이 느껴지는 미모의 승무원이 쟁반에 한 움큼의 사탕을 들고 와 권한다.

나는 '사과사탕' 과 '기름과자' 를 두 알 집어들었다.

드디어 황해를 건너 평양에 가는 것이다.

나는 그때 그 순간에도 모든 게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비행기가 평양 순안비행장에 닿았을 때는 나의 넓적다리를 아프도록 꼬집어 비틀어 보았다. 이후 모든 이야기는 앞으로 중앙일보에 연재될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에 전해 드리게 될 것인데, 첫번 방북은 답사기 연재를 위한 사전조사와 실무협의에 목적이 있었다.

답사에 따른 편의와 안전은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쪽이 책임을 졌고, 역사유적 답사에 대한 실무 안내는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연구사인 리정남 (李定南.48) 선생이 맡아주었다.

리선생은 고구려 고분을 전공한 이름있는 고고학자로 재작년에 완간한 '조선유적유물도감' 전20권의 편집자며 북한학계에서 현지답사를 가장 많이 한 분으로 알려졌다.

중 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가 사전에 답사처를 신청한대로 그들은 우리의 일정을 평양시내 유적과 박물관, 평양 교외의 고구려 벽화고분, 묘향산 보현사와 암자들, 그리고 고고학자.미술사가와의 만남으로 주도면밀하게 짜놓았다.

그들은 이번 일을 그들 말로 해서 '조직사업' 이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사업답게 우리가 가는 곳에는 모두 사전에 연락, 해설강사 또는 안내원 아니면 관리인이 맞이해 빈틈없이 안내해 주도록 조직해 놓았다.

형식만 개인 자격이었을 뿐 우리는 남쪽의 문화사절로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북쪽의 국빈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평양에는 세개의 큰 박물관이 있다. 중앙력사박물관. 미술박물관. 민속박물관. 이름 그대로 역사. 미술. 민속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우리와 비교할 때 역사박물관을 따로 독립시켜 중앙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역사박물관은 선사 고고유물과 복제품에 의한 역사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고 미술박물관에서는 순수 미술품만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박물관의 여러 기능 중 유물의 보존보다 유물을 통한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김일성 광장에서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두 박물관은 결국 북한 동산 (動産) 문화재의 센터격이기도 했다.

진열.소장품 중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물이 상당수 있었고, 특히 일본의 조총련 인사들이 일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를 다시 구입해 기증한 것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그 중 중요한 작품들을 특별실에서 따로 조사할 기회를 가진 것은 큰 기쁨이고 수확이었다.

평양의 유적으로 그들이 우리를 안내해 준 곳은 예상대로 북한에서 항상 내세우는 대성산성 (大聖山城) 과 안학궁 (安鶴宮) 터, 동명왕릉 (東明王陵) 과 정릉사 (定陵寺) 터, 단군릉 (檀君陵) 과 문흥리 고인돌, 보통문 (普通門) 과 평양성 등이었다.

그 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구석기 유적으로 50만년 전 혹은 1백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상원군 (祥原郡) 검은모루 (黑隅里) 동굴터까지 답사했는데 뜻밖에도 상원군의 깊은 산골인 용곡리.귀일리의 고인돌 무덤떼까지 보여주어 조사단은 망외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런 중 남쪽에 사는 사람으로서 50년만에 처음 북녘을 답사하는 조사단의 눈에 가장 가슴 저미는 감동을 주는 것은 역시 대동강변 모란봉 언저리의 평양성 (平壤城) 유적들이었다.

평양 시내의 운치있는 공원으로 단장돼 있는 모란봉 공원에는 대동문 (大同門) 과 연광정 (鍊光亭) , 을밀대 (乙密臺) 와 칠성문 (七星門) 등이 우리가 간혹 사진으로 본 모습 그대로 의연히 우리를 맞았다.

게다가 평양냉면의 원조인 옥류관 (玉流館) 이 거기 있었다.

그러나 한때는 조계종 31본사 (本寺) 의 하나였던 영명사 (永明寺) 는 6.25때 완전히 불타버린 뒤 요양소로 바뀌었고, 부벽루 (浮碧樓) 또한 그 요양소의 경내로 묶여 먼 발치에서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옛날 중학교 국어책에는 어느 시인이 부벽루에 올라 강건너 들판을 바라보며 시를 짓다가 그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먼 산이 점점점 (點點點)…" 하곤 뒤를 잇지 못했다는 글이 실려 있었다.

이 미완 (未完) 의 명시의 주인공은 고려 때 시인 김황원 (金黃元) 인데 나는 그의 시심 (詩心) 이 일어난 옛 자취를 더듬지 못하는 것이 퍽 아쉬웠다.

그러나 그가 쓴 그 싯귀는 지금 연광정 기둥에 한시 원문과 함께 한글 번역문까지 주련 (柱聯) 으로 걸려 있었다.

장성일면용용수 (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 (大野東頭點點山) - 긴 성벽 한쪽으로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들판 동쪽 머리엔 산들이 점점점" 지금도 대동강은 넓은 들판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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