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팀 추방 → 영변 재가동 … 2002 북핵 위기 재연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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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14일 영변 핵시설에서 활동 중인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요원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6자회담 불참을 공언한 외무성 성명이 나온 직후다. 추방령에 이어 북한이 핵시설을 재가동할 경우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로 이어진다. ‘영변 재가동’ 카드를 꺼내며 시작됐던 2002년 2차 북핵 위기 때처럼 이번에도 당시를 재연해 ‘핵무기고’를 채우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2002년 북한은 미국이 핵무기 원료인 고농축우라늄(HEU) 추출을 시도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에 대응해 사찰관 추방과 재가동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이번엔 북한이 먼저 고농축우라늄 개발을 위협 카드로 들고 나왔다. 북한이 14일 성명에서 공개한 ‘경수로 건설 검토’가 그것이다. 경수로는 농축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만큼, 경수로를 짓겠다는 것은 우라늄 농축을 시도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영변(플루토늄)+경수로(고농축우라늄)’라는 두 개의 카드를 한꺼번에 보여주며 2002년에 비해 더 공격적으로 압박한 것이다.

2002년 12월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봉인을 제거한 뒤 IAEA 사찰단을 추방했다. 다음 해 1월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2월엔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했다. 이어 원자로에서 태운 뒤 꺼낸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향후 북한은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폐연료봉 불능화 작업을 중단하고 재처리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을 보수해 플루토늄을 폐연료봉에서 빼내는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영변 핵시설에선 11개 불능화 조치 중 원자로 가동 불능화 등 8개가 완료돼 있다. 그러나 재처리시설의 핵심인 방사능 유출 차단장치(핫셀)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핵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난해 전 세계에 방영된 냉각탑 폭파는 상징적 조치일 뿐 재처리시설은 이르면 한두 달 내 복구가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이춘근 박사는 “현재 영변에 있는 8000여 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면 플루토늄탄 한두 개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경수로를 거론한 점도 오바마 행정부를 더욱 부담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국방연구원의 김태우 박사는 “경수로에는 농축우라늄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는 앞으로 북한이 우라늄탄 제조에 필요한 고농축우라늄을 만드는 기술도 확보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북한이 이번엔 6자회담을 원천 무효화하겠다고 선언하면서 2002년보다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2002년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게 6자회담인데 북한은 아예 이를 없던 것으로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이는 미국에 6자회담 틀이 아닌 북·미 양자회담을 받든지 아니면 핵 무장을 지켜보라고 주장한 것”이라며 “북한은 앞으로 미국이 내놓을 안을 보고 다음 수순을 결정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채병건 기자

◆핵무기 제조 과정=우라늄(U-235)을 연료봉으로 만들어 원자로에 넣어 태우면 핵분열을 거쳐 플루토늄이 포함된 폐연료봉이 남는다. 이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해(재처리) 기폭 장치를 달면 플루토늄 핵폭탄이 된다. 우라늄을 원심분리기 등으로 순도 90% 이상으로 농축시켜 고농축우라늄을 얻으면 우라늄탄 제조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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