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쿠바 봉쇄 47년 만에 해제 … ‘스마트 외교’ 첫 작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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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가 쿠바 봉쇄 정책을 47년 만에 일부 해제했다. 힘을 바탕으로 한 ‘하드 파워’ 외교 대신 대화와 타협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 파워’ 외교를 중시하고, 상황에 따라 모든 외교적 도구를 활용하겠다는 오바마 정부의 ‘스마트 파워’ 외교가 처음 실현된 것이다. 오바마의 새로운 시도가 그동안 압박 위주 외교를 전개했던 남미 국가들이나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영향을 미칠지 주목되고 있다.

오바마는 17일부터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열리는 미주정상회의에 참석해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등 중남미 정상들과 만난다. LA 타임스는 “남미 좌파 정권의 지도자들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이번 조치가 자신들과의 관계 개선 여부를 가늠하는 시험대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에선 지난해 대선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오바마가 쿠바 다음으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쿠바 내 정보통신사업 허용”=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13일(현지시간) “오바마 대통령이 국무부·재무부·상무부에 지시해 쿠바에 친지를 둔 미국인의 현지 방문과 송금이 자유롭게 이뤄지도록 모든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고 발표했다. 또 “미국의 통신서비스 회사들이 쿠바와 미국을 연결하는 광케이블과 위성통신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며 “쿠바 주민들이 휴대전화나 위성TV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미국 내 친척이 요금을 대신 지불하는 길도 열었다”고 밝혔다. 오바마는 또 조지 W 부시 전 행정부가 2004년부터 시행한 쿠바인에 대한 선물 제공 제한 규정도 풀었고, 미국과 쿠바 간 정기 항공노선 개설 문제도 연구해 보도록 관련 부처에 지시했다. 기브스 대변인은 “피델 카스트로가 통치했던 지난 반세기 동안 암울하게 살았던 쿠바인들의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신장시키자는 것이 이번 조치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오바마 정부는 쿠바에 대한 전반적인 수출입 금지 조치, 일반인들의 여행과 송금 제한 규정은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 정부의 발표 직후 카리브해 일대와 미 플로리다주에 사업 기반을 둔 선박·화물 운송업계 주식이 크게 올랐다. ‘쿠바 특수’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하루 주가가 41%나 폭등한 ‘헤르츠펠트 캐리비언 베이슨 펀드’의 토머스 헤르츠펠트 회장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 정부가 선박 운송사들의 쿠바행 여객선 운항까지 허용하면 수익이 두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47년 만의 방향 전환=1959년 쿠바에 카스트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62년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쿠바에 설치되자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정부는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입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2000년 미 의회가 미국 농산물에 한해 쿠바가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한 법률을 통과시켜 일부 수출입을 허용한 것 외에 기본적인 봉쇄정책 틀은 47년 동안 지켜져 왔다. 오바마 정부 역시 수출입 금지 조치엔 손대지 않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정보통신사업을 허용함으로써 양국 간 경제 교역이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또 150만 명에 달하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쿠바 자유 왕래와 무제한 송금도 ‘역사적인 방향 전환의 하나’(CNN)로 평가받고 있다. 부시 전 행정부는 쿠바계 미국인에 한해 3년마다 2주 동안만 쿠바 내 친척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고, 분기마다 최대 300달러까지만 송금을 허용했다.

◆쿠바 “아직은 미흡”=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은 관영 웹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미 정부가 수출입 금지 조치를 해제하지 않은 데 대해 미흡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뉴욕 타임스(NYT)도 “수출입 제한이 일반 쿠바인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던 만큼 오바마 대통령은 더 먼 길을 가야 한다”며 보다 대폭적으로 제한조치를 해제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정보통신사업은 쿠바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쿠바가 시큰둥한 상황에서 당장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또 미 공화당 지지층에선 이번 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있는 상황에서 쿠바 정부가 미국의 조치에 상응하는 민주적 개혁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역풍이 불 수도 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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