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벌로 안 되면 상으로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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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분수대’를 기억하시는지. 전직 대통령 패밀리의 도둑정치를 원조인 아프리카 도둑정치에 빗댄 재치 있는 글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이브라힘상(賞)’이라는 게 기발했다. 아프리카 국가수반 중에 합법적 선거로 뽑혀 재임 중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다가 임기가 끝날 때 제 발로 물러난 사람에게 주는 상이란 거였다. 상금도 적지 않아 10년간 매년 50만 달러, 이후 죽을 때까지 20만 달러씩 준다는 거다. 오죽하면 그런 상을 다 만들까 실소하면서도 한편으론 투명한 민주정치를 어떻게든 뿌리내려 보려는 간절함에 감동까지 느껴지는 노릇이었다.

분수대 필자는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척했던” 전 정권의 부패상을 개탄하면서 “우리도 ‘뒷모습이 아름다운 지도자상’이라도 만들어야 될 모양”이라는 말로 글을 마쳤다. “와이 낫(Why Not)?” 안 될 게 뭐 있나. 오히려 “머스트 해브(Must have)”가 옳지 않나 싶다.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 없이 판단하고 처신할 나이도 됐건만 여전히 로맨스와 스캔들도 구분하지 못하는 ‘이역(耳逆)’ 대한민국에 무슨 수를 내야 되지 않겠나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전 정권 비리 스캔들은 이제 화나기보다 한물간 개그 보듯 지겨울 정도다. 창의성 있는 새 수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번 그게 그거다. 그래서 늘 같은 쇠고랑 소린데도 교훈을 못 얻고 또 같은 짓이다.

벌로써 안 되니 상으로 해보는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체험 소설 『죽음의 집에 대한 기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권력을 가진 자는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잃는다. (…) 그것은 마침내 질병으로 변한다.” 권력이라는 불치병이다. 그러니까 미리 예방주사를 놓자는 얘기다. 우리도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 비리 여부를 조사해 문제가 없으면 상을 주는 거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아무도 그렇지 못하니 위대한 거다. 따라서 초대 수상자는 대단한 명예가 될 수 있을 터다. 그 이후로는 또 공인청정(公認淸淨) 전임자와 비교될 테니 스스로 행동을 삼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전직 대통령으로서 충분히 품위 유지할 수 있는 상금을 주려면 재원이 있어야 한다. 이브라힘상은 수단 출신 사업가 모 이브라힘의 작품이다. 아프리카 이동통신의 선두주자 셀텔(Celtel)의 창업주로 2005년 회사를 팔아 번 돈 34억 달러로 기금을 만들었다. 그 정도 거금은 아니지만 우리도 재원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헌납할 300억원대 재산 말이다.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사람이 기업 해서 모은 돈을 정치 발전을 위해 내놓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그가 초대 수상자가 될 수도 있을 터다. 그렇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그는 자기 재산 일부를 되찾아서 좋고 국민은 깨끗한 대통령을 만났으니 복이다.

연금만으로 생활이 충분한 사람은 상금으로 사회사업을 할 수도 있을 터다. 퇴임 후 사회공헌에 이바지하는 대통령, 생각만 해도 반갑다. 지원금을 더 제공할 수도 있겠다. 이브라힘 재단도 수상자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회활동을 할 경우 10년간 해마다 20만 달러씩의 지원금을 더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란다.

아프리카에나 있는 상을 도입하는 게 남 부끄럽다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네 정치 수준이 그 정돈데 어쩌겠나. 주제 파악이 중요한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아프리카의 현실이 저 꼴인 것도 감당 못할 정치제도를 섣불리 이식받은 결과다.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인 곳에 선진국보다 복잡한 정치구조가 들어섰으니 잘 굴러갈 턱이 없었다. 이브라힘은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격일지라도 분명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아프리카에서 빌려 왔지만 효과는 우리나라에서 더 있을 거라 믿는다. 자신할 순 없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아프리카보다는 좀 나을 테니까.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

▶지난주 ‘분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