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아직 우린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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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는 믿는다, 희망은 늘 절망의 끝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른다는 것을. 그리고 희망은 은근한 그리움과도 같아서 간절함 없이는 결코 우리에게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도. 외환위기로 빚어진 우리 경제의 참담함이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으로 드디어 그 처절한 몰골을 드러냈을 때 처음엔 수치스러움이, 뒤이어 분노가 밀려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불안이다.

가장이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 태국.인도네시아가 그렇듯 물가가 엄청나게 뛰어오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 영영 우리 경제가 주저앉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 저마다 근심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한 선진국, 세계 11위 경제대국, 국민소득 1만달러의 나라…. 이 빛나던 '대한민국' 이 IMF 급전 (急錢) 까지 사정해가며 빌려다 쓸 지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문열 (李文烈) 씨는 그의 소설에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고 했지만 이쯤 되고 보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들마저 "일본 최대의 실수중 하나는 자존심 강한 한민족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 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존심 강한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그러니 선진국 반열에서 곤두박질쳐 경제신탁통치를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치욕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수치심' 의 저자 게센 카우프만은 '수치심은 모멸감이나 비굴감에서 비롯된 것이든, 난관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든간에 주체 스스로가 경험하는 가장 쓰라린 경험' 이라고 말한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라고 만나는 이들마다 한탄을 나눈다.

한탄은 연초부터 국내외 경제기관들이 외환위기에 대해 사전경고를 해왔으며, 국내 외환 보유고 등 실상을 어물쩍 감춰 국제금융기구 등으로부터 신인도가 떨어지게 됐고, IMF와의 합의 내용마저 숨겼다가 IMF가 발표하니까 뒤늦게 그런 게 있었다고 실토한데 이르면 분노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저성장 등 경제구조조정, 금융기관 정리, 사실상의 재벌 해체…. IMF의 요구조건이 속속 밝혀질수록 불을 보듯 뻔하게 다가올 태풍급 감원.높은 세금부담.고물가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불안을 가슴에 묻어두고 그래도 분연히 일어선 이들이 있다.

외화 모으기에서 시작된 사회단체들의 활동은 이제 신국채보상운동으로 진일보하고 있다.

과소비추방범국민운동본부.YMCA.YWCA.전국주부교실중앙회 등이 벌이고 있는 외화 모으기에 가세해 새마을부녀회중앙연합회는 1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우리 아기 돌반지로 나라경제 살립시다' 는 캠페인을 벌이며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펼친다.

이 애국가락지 운동은 1907년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서 빌려 쓴 1천3백만원을 국민들 스스로 모금해 갚아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들이 펼쳤던 탈환회 (脫環會) 활동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여성들은 패물을 바치거나, 식사량을 줄이고 쌀을 모은다거나, 물을 직접 길어 와 물지게꾼에게 지불할 돈을 절약해서 바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라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려는 의지를 보였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고 했던가.

하지만 이제 여자도 강함을 보여줄 때가 됐다.

한국 여성의 강인함은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제 그 힘을 보여주자. 여성들의 힘으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자. "로이터 통신기자가 와서 묻더군요. 왜 외화를 모으냐고요. 그래서 '우리의 잘못도 있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지요. 우리가 모은 돈은 나라에 헌금할 것이라고 했더니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 이라며 깜짝 놀랍디다.

" 대한YWCA 이진용 부장의 말이다.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불안의 틈새를 뚫고 국민들이 심연에서 한 움큼씩 건져 올리는 희망의 샘물을 더욱 풍성하게 가꿔내는 것은 정부와 기업의 몫이다.

홍은희<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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