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기업 외화 조달 한결 쉬워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뉴스 분석 9일 정부의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 성공은 한국 경제가 추운 겨울을 벗어났다는 또 하나의 신호다.

특히 달러가 부족해 생기는 외환위기 개연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다. 외평채 발행을 통해 달러를 당장 들여올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민간의 달러 조달도 한결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9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금통위는 이날 기준금리를 2%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연합뉴스]


외평채 발행액은 바로 외환보유액에 잡힌다. 30억 달러의 외평채 발행은 외환보유액이 30억 달러 늘어나는 것을 뜻한다. 금액만 놓고 보면 외환보유액이 2000억 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30억 달러는 큰 규모가 아니다. 그러나 국제 금융 시장의 불안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선 힘닿는 대로 달러 조달을 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정부의 외평채 발행은 민간의 외화 차입에 기폭제 역할을 할 전망이다. 통상 은행이나 기업들은 외평채 발행금리에 얼마간의 금리를 더 얹어주고 해외 차입을 한다. 외평채 발행 금리가 민간의 해외 차입 때 기준금리가 된다. 하지만 지난해 9월 미국 금융회사인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외화 차입 시장이 쇼크에 빠진 뒤로는 이런 기준금리가 실종되다시피했다. 은행이나 기업 입장에선 어느 수준이 적정 금리인지 가늠할 수 없어 차입을 주저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외평채 5년물과 10년물 발행은 해외 차입에 나서는 민간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전문가들은 국책은행이나 공기업의 경우 외평채 발행금리에 0.5~1.0%포인트를 더 얹는 수준에서 차입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김익주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은 “이번 외평채 발행을 통해 외화유동성 확충과 한국물 기준금리 제공이라는 두 가지 목적이 모두 달성됐다”면서 “은행이나 기업의 외화 조달 금리가 내려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날 외평채 발행에 당초 예정 물량의 4배에 달하는 80억 달러의 주문이 몰린 것은 고무적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물에 대한 수요가 많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부는 한국 경제에 대한 외국인투자자의 신뢰가 확인됐다고 반기고 있다. 이에 힘입어 4~5월 국내 기업과 은행들이 20억~30억 달러의 차입에 나설 전망이다.

김익주 국장은 “각종 위기설 등 한국 경제에 대한 근거없는 부정적 시각을 종식시키고, 북한 로켓 발사로 인해 일부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안심리도 차단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는 달러 공급이 수요에 비해 부족할 때 생기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이후 주기적으로 한국 경제를 괴롭혀온 ‘위기설’도 따지고 보면 달러 부족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평채 발행에 이어 민간의 외화 차입까지 원활히 이뤄지게 되면 위기설은 설 땅을 잃게 된다.

이번 외평채의 발행금리 수준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이번에 발행한 10년물의 경우 7.26%인데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엔 9.083%, 신용카드 사태가 한창이던 2003년 5월엔 4.306%로 각각 발행됐다. 국제 금융시장이 아직 본격적으로 해빙되지 않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나쁜 조건은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하나은행 박현준 국제금융부장은 “최근 상황을 종합해 보면 괜찮은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평상시보다 가산금리를 3%포인트나 더 얹어준 것은 지나치다는 시각도 있다.

이상렬·최현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