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 칼럼

경제위기로 또 꼬여버린 미국·유럽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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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미국·유럽 관계가 또다시 표류하는 주요 원인은 위기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반면 유럽은 국가 부채와 인플레이션을 걱정한다. 미국은 더 이상의 경기 하강을 막기 위해서 케인스 경제학에 의존해 막대한 재정지출로 수요를 진작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은 경기회복 정책을 펴긴 하되 미국 수준의 국가 부채를 떠안을 의사는 없는 상태다. 게다가 유럽 특유의 복지 시스템은 경제 악화로 인한 사회적 충격을 당분간은 감당할 여력이 있다.

정치적인 고려도 한 몫을 한다. 이제 막 4년 임기를 시작한 오바마 입장에선 정치적 운명이 경제회복에 달려 있다.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정치생명에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런데 유럽의 지도자들은 각기 전혀 다른 숙제에 직면하고 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다. 영국 경제는 미국만큼이나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금융 시스템의 완전한 붕괴를 막기 위해선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질 전망인데 브라운 총리에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적만이 그를 구할 수 있는 셈이다.

브라운이 처한 곤경은 독일과 프랑스에는 재앙의 전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정치적 모험을 할 생각이 별로 없다. 그래도 메르켈 총리는 향후 위기 해결 과정에서 유럽의 입장을 정할 때 중심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독일 경제가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최대 규모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는 9월 재선에 도전하는 그녀로선 리더십을 보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예측불허다. 메르켈 총리는 아주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다. 만약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쪽을 택한다면 가뜩이나 국가 부채 증가, 국유화, 경기부양 조치 등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지지율이 곤두박질칠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초여름께 실업률이 급등하고 유명 기업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메르켈 총리는 위기 대처에 미흡했다는 비난과 함께 정권을 빼앗길 게 뻔하다. 쉽지 않은 선택인 만큼 메르켈 총리는 입장 표명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이 이처럼 각자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바람에 서방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유럽 관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인다. 이로써 위기 대처 과정에서 중국이 최대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위기가 끝난 뒤 재편되는 세계 질서에서 새로운 지정학적 중심축은 미·중 관계가 될 텐데 유럽이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유럽이 케인스 경제학에 입각한 오바마의 해법이 성공할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입장을 취한다면 나중에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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