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나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이성복 ‘모래내 1978년’ 부분)
‘가재울 뉴타운’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서울 북가좌동과 남가좌동 일대. 고지도에 ‘사천(沙川)’이라 표기된 홍제천 옆 이 땅을 사람들은 ‘모래내’라 불렀다. 옹기종기 집 짓고 수십 년 살았던 사람들이 재개발 때문에 이곳을 떠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가재울의 마지막 풍경과 기억을 기록한 뉴타운 민속지 『가재울』 전 3권을 냈다.
가재울 3구역 수재민 정착마을. 철거가 덜 된 빈집 앞마당에 풀이 무성히 자랐다. 멀리 새로 생긴 아파트촌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가난이 다스리던 동네=홍제천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던 모래내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땅이었다. “물이 많으면 철로 다리(경의선 철교)로 건너와야 돼. 한 반쯤 갔는데 빽빽 기적을 내잖아, 기차가. 그래서 살려고 그냥 다리 밑에 내려갔지.”(이대용·84세)
1950년대 말 이후 이촌동 수재민과 용산 철거민 천막촌이 들어섰다.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사천교가 놓이면서 ‘서울 드림’을 꿈꾸는 각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판자촌을 지었다. “송장뼈를 얼마나 내왔는지 몰라. 뉴타운 되어 밀면 뼈다귀 꽤 나올 거예요. 공동묘지였거든.”(이보금·70세)
송옥태(72)·강춘송(67)씨 부부는 상경해 모래내로 이사오던 첫 날, 미로처럼 얽힌 판자촌 골목에서 딸을 잃어버렸다 간신히 찾았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빗물을 독에 받아두거나 이웃 동네에서 물지게를 져 날랐던 그곳엔 1968년 첫 대중목욕탕이 들어섰다.
방 한 칸 짓고 가재울에 정착한 수재민들 은 식구가 늘면서 다락방을 올리고, 방을 붙여 지으며 집을 늘려갔다.
42년간 포목점을 운영한 홍용선(70)씨가 갖고 있는 자는 40년이 넘었다. 1년에 한번씩 동사무소에 갖고 가 치수를 속이지 않았나 검사를 맡던 자다. 어렵던 시절에 사기꾼, 잡도둑은 더 극성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첫 손님이 하루를 좌우한다”는 등의 ‘속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서울 서북부 최대 상권을 형성하며 남부럽지 않게 벌어먹고 살았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던 그들은 이제 일찌감치 문을 닫는다. 모래내시장 일부는 뉴타운지구에 편입돼 사라진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 나왔던 그 풍경도 사라질지 모른다. 조사를 총괄한 오문선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제언한다.
“다른 재래시장들은 아치형 지붕을 단 획일적인 모습으로 리모델링 됐습니다. 번듯한 걸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가난한 시절의 풍경들이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채 잊어버립니다. 재래시장의 원형을 보존한 모래내시장은 산업화 시기 서울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콘텐트 산실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 그 공간을 생태박물관의 형태로 보존해야합니다.”
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