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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촌·물지게·재래시장 … 사라져가는 모래내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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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거기서 나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이성복 ‘모래내 1978년’ 부분)

‘가재울 뉴타운’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서울 북가좌동과 남가좌동 일대. 고지도에 ‘사천(沙川)’이라 표기된 홍제천 옆 이 땅을 사람들은 ‘모래내’라 불렀다. 옹기종기 집 짓고 수십 년 살았던 사람들이 재개발 때문에 이곳을 떠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가재울의 마지막 풍경과 기억을 기록한 뉴타운 민속지 『가재울』 전 3권을 냈다.

가재울 3구역 수재민 정착마을. 철거가 덜 된 빈집 앞마당에 풀이 무성히 자랐다. 멀리 새로 생긴 아파트촌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가난이 다스리던 동네=홍제천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던 모래내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땅이었다. “물이 많으면 철로 다리(경의선 철교)로 건너와야 돼. 한 반쯤 갔는데 빽빽 기적을 내잖아, 기차가. 그래서 살려고 그냥 다리 밑에 내려갔지.”(이대용·84세)

1950년대 말 이후 이촌동 수재민과 용산 철거민 천막촌이 들어섰다.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사천교가 놓이면서 ‘서울 드림’을 꿈꾸는 각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판자촌을 지었다. “송장뼈를 얼마나 내왔는지 몰라. 뉴타운 되어 밀면 뼈다귀 꽤 나올 거예요. 공동묘지였거든.”(이보금·70세)

송옥태(72)·강춘송(67)씨 부부는 상경해 모래내로 이사오던 첫 날, 미로처럼 얽힌 판자촌 골목에서 딸을 잃어버렸다 간신히 찾았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빗물을 독에 받아두거나 이웃 동네에서 물지게를 져 날랐던 그곳엔 1968년 첫 대중목욕탕이 들어섰다.

방 한 칸 짓고 가재울에 정착한 수재민들 은 식구가 늘면서 다락방을 올리고, 방을 붙여 지으며 집을 늘려갔다.

◆모래내시장 사람들=1966년 모래내시장이 들어선다. 소상인들의 삶은 잡초같았다. 30여 년간 기름가게를 해온 김규섭(64)씨. 처음엔 가게 안쪽에 한평 남짓 방을 만들어 살았다. 겨울이면 소방서에서 불법 건축물 점검을 나와 해머로 방을 깨부쉈다. “갈 데가 없으니까 일주일(소방점검 기간)간 애들 두 놈 어깨쯤에다 업고 가게에 앉아 날 새 버렸어.”

42년간 포목점을 운영한 홍용선(70)씨가 갖고 있는 자는 40년이 넘었다. 1년에 한번씩 동사무소에 갖고 가 치수를 속이지 않았나 검사를 맡던 자다. 어렵던 시절에 사기꾼, 잡도둑은 더 극성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첫 손님이 하루를 좌우한다”는 등의 ‘속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서울 서북부 최대 상권을 형성하며 남부럽지 않게 벌어먹고 살았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던 그들은 이제 일찌감치 문을 닫는다. 모래내시장 일부는 뉴타운지구에 편입돼 사라진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 나왔던 그 풍경도 사라질지 모른다. 조사를 총괄한 오문선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제언한다.

“다른 재래시장들은 아치형 지붕을 단 획일적인 모습으로 리모델링 됐습니다. 번듯한 걸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가난한 시절의 풍경들이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채 잊어버립니다. 재래시장의 원형을 보존한 모래내시장은 산업화 시기 서울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콘텐트 산실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 그 공간을 생태박물관의 형태로 보존해야합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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