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한국의 혼돈 - 일본의 계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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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일본은 어김없이 북한과 대화를 나누는 여러 개의 채널을 가동해 왔다.

서울에 정쟁 (政爭) 의 먹구름이 끼면 도쿄 (東京) 와 평양 사이에는 무지개 다리가 섰다.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이 하야하기 한해 전인 1959년엔 새 보안법에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의 국회 농성과 자유당을 비판하는 데모, 그리고 뒤이어 집행된 조봉암 (曺奉岩) 의 사형으로 시끌벅적했다.

그해말 일본은 재일교포 제1진을 '지상의 낙원' 인 북한으로 '귀환' 시켰다.

일본 적십자는 북송사업을 인도적인 문제라고 선전했다.

30여년 뒤인 90년 9월 일본의 부총리를 지낸 가네마루 신 (金丸信) 은 급거 평양으로 날아갔다.

전격적으로 북.일 (北.日) 수교협상을 끌어낼 듯한 기세였다.

그때 서울에서 서로 앙앙불락해 온 노태우 (盧泰愚).김영삼 (金泳三).김종필 (金鍾泌) 등 3인의 정당이 합당을 선언하고 누가 얼마나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느냐로 날이 새고 질 때였다.

외교란 당시 정치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다시 7년 뒤인 요즘 일본의 여3당 대표들이 대거 북한으로 몰려가고 일본 기자들을 태운 전용기가 평양공항을 빈번히 이.착륙할 정도로 북.일간의 가교는 더욱 단축됐다.

도쿄로 쏟아지는 서울발 외신의 껍질을 벗겨놓고 보면 대선 상황은 이념도 공약도 분명하지 않은 정치집단의 이전투구에다 불륜의 극치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남북관계가 주요 현안으로 걸려 있고 4자회담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다 선거정국마저 혼탁한 판국에 일본 여3당의 대표들이 평양 방문길을 서두르는 것은 외교를 내팽개치다시피한 한국의 후진성을 역이용했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한국의 어깨 너머로 진행되는 대북 (對北) 접근 시도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경고는 이제 아무런 무게를 갖지 못한다.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가 북한의 김정일 (金正日) 총서기 앞으로 친서를 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체통을 살려주었다고 생색을 낼 수 있게 됐다.

일본의 정가와 두터운 파이프를 가졌다는 김종필.박태준 (朴泰俊).김윤환 (金潤煥) 씨 등 어느 누구도 인맥을 동원해 일본의 대북정책에 대한 자기 목소리를 낸 흔적이 전혀 없다.

일본의 실력자들과는 전혀 생소한 이회창 (李會昌).김대중 (金大中) 씨의 경우엔 더욱 말할 것도 없다.

한국 외무부가 일본에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 며 방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정부 역할의 전부였다.

일본은 이미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미.중.러시아에 버금가는 외교력을 행사하는 훈련을 쌓고 있다.

한.미 안보문제도 미.일 안보체제의 종속적인 위치로 서서히 몰아가는 인상이 짙다.

북한에 관해선 미국이 카터 전대통령을 매개로 하는 접근정책보다 더 유용한 '여3당' 카드로 물꼬를 트고 있다.

틈이 보이면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 일본 외교의 특성이다.

그렇지 않고선 북한과의 수교라는 최대의 외교업적을 선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허점이 부각될수록 도쿄와 평양은 서울을 거치지 않고 논스톱으로 연결될 항로를 준비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국가엔 남북한 문제를 꿰뚫고 있는 일본의 전문가들이 외교무대 또는 경제현장에 포진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 고압적이고 강경한 자세로 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북한의 외교 수준과 한국의 후임 대통령이 차별화되지 않으면 국제무대에서 또 놀림거리가 될 판이다.

한국이 일본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일본이 한국을 아는 것보다 몇배 어려울 것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65년 한.일회담에 관해서 일본의 역사학자 하타다 다카시 (旗田巍) 는 우리에게 뼈아픈 충고를 했다.

그는 여러가지 법이론을 내세워 이런저런 배상을 거절한 일본의 사려깊지 못한 행위를 비난하면서 그러나 한국의 지도층은 민족의 자주발전 입장에서 일본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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