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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계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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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스위스 은행들이 고객에게 비밀계좌를 열어준 것은 선의에서 시작됐다. 19세기 후반 독.불전쟁 당시 서민들이 전쟁에 휩쓸려 재산을 잃는 일이 빈번하자 "박해받는 사람의 재산을 스위스가 지켜주겠다"며 비밀계좌를 만들어줬다. 비밀계좌가 공식적으로 법에 의해 보호받게 된 것은 1934년. 독일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대인들이 부동산을 팔아 안전하다고 소문난 스위스 은행에 예치하기 시작하자 스위스 정부는 '은행비밀법'을 만들었다. 유대인의 예금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서 실속도 차렸다. 이후 유대인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범죄자금, 독재자들이 부정 축재한 재산 등이 스위스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누가 뭐래도 영세 중립국답게 비밀 보호에 열중하던 스위스 은행은 유대인 예금 때문에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이 예금한 돈을 스위스 은행들이 슬그머니 삼켜버린 사실이 90년대 후반 드러난 것이다. 97년 한 스위스 은행의 경비원이 파기 직전에 놓여 있던 서류 뭉치를 세상에 폭로했다. 서류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베를린에서 이뤄진 재산 거래내역이 담겨 있었다. 스위스 은행들이 얼마든지 후손을 찾아내 돌려줄 수 있었던 돈을 아무 말없이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 물증으로 확인된 것이다. 스위스 은행들은 이 해에만 3억달러 가까운 돈을 희생자 유가족과의 화해조치에 지불해야만 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 80년 이전에는 이자는커녕 보관료를 내야 했다. 그런데도 은행비밀법 때문인지 400여개 스위스 은행에 몰려든 세계 각국의 개인예금은 현재 1조2000억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테러에 이용될 수 있는 스위스의 비밀계좌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비밀계좌를 없애는 게 테러조직의 숨통을 끊는 효율적 방법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스는 비밀보호와 범죄는 별개의 문제라며 요지부동이다. 이 와중에 싱가포르 은행이 스위스 은행 자리를 넘보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스위스는 80년부터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싱가포르는 익명 계좌까지 인정하고 있다. 검은돈이든, 흰돈이든 무조건 좋다는 인간의 욕심이 테러조직도 계속 먹여살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세정 논설위원

*** 바로잡습니다

6월 26일자 27면 분수대 '비밀계좌' 중 '싱가포르는 익명계좌까지 인정하고 있다'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므로 바로잡습니다. 싱가포르는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계좌 평가프로그램(FSAP) 팀으로부터 돈세탁 및 테러 계좌 방지를 위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