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밀실서 탈색된 정치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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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9일 오후3시30분 국회 도서관 508호. 10평 남짓한 골방이다.

고비용 정치구조 개선을 위한 정치개혁입법특위의 여야 협상대표들이 모인 장소는 이렇게 은밀한 곳이었다.

이날은 협상결과 최종발표를 하루 앞두고 각당 대표가 마지막 협상을 벌인 날이었다.

"널찍한 국회 본관 회의실도 많은데 하필 여기서 만납니까?" "…내일 발표는 국회 본관에서 할거요. " 정치개혁입법특위는 연초 정치권과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한보사건의 여파로 탄생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검은 돈 수수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들끓자 정치인들은 앞장서 돈 덜 쓰는 정치구조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한보사건이 세인들의 뇌리에서 차차 잊혀지는 것과 비례해 정치개혁특위에서 전해지는 소식도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정파를 초월하자는 당초의 옹골찬 결의 대신 대선을 앞둔 이해관계를 따지는 목소리만 전해졌다.

특히 협상테이블의 주제는 정치자금법에서 급격히 선거법으로 옮겨갔다.

급기야 특위는 별다른 결론도 내지 못했고 협상은 여야 3당총무와 특위위원장이 참석하는 4자회담으로 떠넘겨졌다.

이때부터 회의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됐다.

회의장소 또한 63빌딩 모식당에서 이날처럼 국회내 구석진 방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밀실협상이 벌어진 것이다.

협상결과만 좋으면 장소야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걱정했던대로 여야가 합의사항이라고 내놓은 내용들은 고비용 정치구조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성과가 없다곤 볼 수 없다.

지정기탁금제 폐지라든가 선거 홍보물 축소, 옥외연설회 폐지등은 특위의 구성취지에 부합하는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번에 여야가 합의한 내용들로 과연 우리 정치가 돈 안드는 구조로 바뀔 수 있을까. 부정적이다.

남의 나라에서 하는 정치자금 공개제도 같은 규정들은 왜 외면했는가.

선거비용의 투명성 보장을 위해 입.출금 예금계좌를 공개하는 제도를 두자는 시민단체의 요구는 어디로 증발했는가.

'눈가리고 아웅' 이 아닐 수 없다.

결과가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각당 모두 '우리당 선거에 유리한 규정 만들기' 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한보사건때 들끓었던 여론의 분노를 정치권은 벌써 잊어버렸다.

박승희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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