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의료원 해외의료봉사 참관기…피지에서 펼친 한국인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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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천혜 (天惠) 의 아름다운 휴양지로 알려진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변과 초원,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빛과 어우러져 한가로움을 더해 주는 키 큰 야자수. 그러나 자연속에 묻혀있는 80만의 피지주민 대부분은 의료사각지대에 방치돼 간단한 치료만으로 완치될 수 있는 질병을 떠안은채 살아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10시간 거리. 11명의 한림의료원 무료봉사팀은 지난 13일부터 일주일간 피지의 비타와에서 봉사활동을 펼쳐 한국인 의사들의 따뜻한 손길을 전했다.

"어떻게 이처럼 갑자기 숨쉬기가 편해질 수 있을까" 천식때문에 보기에도 딱할 정도의 거친 숨소리를 내며 진료를 받던 비타와 부락의 나르삼라 (78) 할아버지. 주사와 흡입제 사용으로 얼마후부터 편한 숨을 쉬게 된 그는 놀라운 치료효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켠에서는 겨드랑이에 생긴 수박만한 고름덩어리로 고통속에 살아야했던 한 청년이 30여분간의 고름제거 시술후 환호를 터뜨리자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은 마치 자기일인양 일제히 박수를 쳐댔다.

환자들을 둘러본 진료팀 단장 이병철 (李秉哲.한강성심병원 부원장) 교수는 "위생상태가 열악한데다 질병치료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어 한국에서는 보기드문 감염성환자가 많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고 했다.

1인당 국민소득 2천달러 수준인 피지는 영국의 의료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의료사회주의 국가.

거의 모든 진료와 수술은 무료며 입원시엔 하루 피지돈 약50센트 (한화 3백원정도) 를 식대조로 지불하면 된다.

단 치과진료는 돈을 지불해야 되는데 이를 뽑는데는 피지돈 2달러 (한화 약1천2백원) , 충치치료는 한번 치료때마다 5달러 (약 3천원)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주민에겐 병든 이도 치료해 살리는 일반적인 치과치료는 먼나라 이야기다.

충치로 심한 통증을 느끼면 뽑아버리는 것이 상례. 잘 웃는 피지인에게서 가지런한 치아를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무료로 이를 뽑아 줄 의사들이 마을을 방문한다고 해서 왔다" 며 함박웃음을 짓는 아멜리아 나베텔레브 (여.33) 도 이미 충치때마다 이를 뽑아 앞니가 듬성듬성한 상태다.

섬나라 피지에는 그나마 전국에 의사 3명이상을 둔 병원이 25개, 의사 1~2명이 있는 보건소가 74개등이 있긴 하지만 거주지에서 병원까지 가는 교통편이 없어 의료시설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인셈. 더구나 이런 열악한 사정을 부추기는 것은 피지의 의과대 졸업생들 3분의 2이상이 더 나은 봉급등을 받을 수있는 호주.뉴질랜드등으로 떠난다는 점이다.

전문의 훈련과정조차 없는 이나라 전체 의사수는 3백70명정도로 의사 1인당 2천1백70명을 돌봐야 하는 꼴. 이는 우리나라의 의사1인당 국민수에 비할 때 배가 넘을 정도로 태부족인 상태다.

그래서 피지에선 간호사의 역할이 크다.

실제로 아이출산은 물론 다쳐서 찢어진 부위를 꿰메는 작은 수술도 간호사의 몫. 치료가 잘못돼도 불평하는 환자도 없다.

부락진료에 동반한 라키라키병원 솔로몬 원장 (남.34) 은 "오늘같은 부락진료는 병을 방치한 채 지내는 주민들에게 병원치료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것" 이라며 한국의료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자신의 질병을 남의 병보듯 느긋한 (?) 환자 못지않게 이곳 의료진들의 움직임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대기실에서 아무리 많은 환자가 기다리더라도 의료진은 점심시간은 물론 진료 도중인 오전.오후에 30분씩이나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갖는다.

환자접수도 점심시간을 방해 (?) 받지 않도록 일찌감치 마감하는 것이 상례. 물론 이에 대해 불평하는 환자나 보호자는 보이질 않는다.

사정은 입원실도 마찬가지. 입원환자나 보호자는 간호사들이 모여 잡담하는 동안엔 급한 용무가 있더라도 잡담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게 보통이다.

모세기관지염으로 입원한 6개월된 아들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로와따 리꾸 (32) 는 고작 혼잣말로 "의료진들이 빨리 손을 써 줬으면 좋으련만…. " 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같은 상황은 환자가 밀려오면 점심식사를 거르는 일이 예사로 돼 있는 한국의료진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우리나라 의료진의 피지의료봉사는 이번이 4번째. 작년 10월 한림대의료원이 처음 진료를 한 후 금년봄엔 혜민병원팀이, 여름엔 경희대 졸업생들이 진료를 했다.

그래도 남태평양에선 가장 잘 산다는 피지를 우리나라 의료진들이 자주 찾는 이유는 양국간의 독특한 우호관계때문. 피지는 한국이 UN 가입시 문서로 지지한 최초의 나라인데다 지난 87년 KAL기 폭파사건 이후엔 앞장서 북한과 외교를 단절했을 정도. 그 답례로 한국국제협력단 (KOICA) 이 60만달러를 들여 오지인 라키라키지역에 96년 병원을 건립했었다.

아시나떼 볼라두아두아 피지 보건국장 (54) 은 "한국이 의료봉사외에도 피지의사의 한국내교육등 의료수준 전반의 발전에 큰힘이 되주길 희망한다" 고 했다.

피지 = 황세희 <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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