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개판에서 질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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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개판' 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와 분위기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카오스에 딱 맞는다.

이 개판의 중시조 (中始祖) 는 구조화한 거대부패다.

구체적으로는 3金과 3金정치로 상징화되어 있다.

신한국당 이회창 (李會昌) 총재가 DJ비자금과 함께 YS의 92년 대선자금도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나는 개판으로부터 태어나려는 새 질서의 작은 배아 (胚芽) 를 느꼈다.

자기당 소속 현직대통령인 YS의 탈당을 요구하는 데까지 그의 말이 이어지자, '드디어 여기까지 이르게 되는구나' 라는 전율도 느꼈다.

이런 질서의 배아역을 맡은 것은 이회창씨가 처음은 아니다.

실은 YS가 먼저 맡았었다.

군사독재적 부패개판을 만들었으며 3金과는 물위에서는 적대하면서 물밑에서는 함께 부패 핵융합을 일으켰던 전.노 (全.盧) 를 잡아 가둔 것이 YS였으니 말이다.

새로 태어나려는 질서의 움은 이런 YS마저 고발하려 하고 있다.

카오스가 다시 질서로 바뀌려면 카오스를 만든 원인을 이 배아가 파괴하는 일부터 치러야 한다.

개판에서 난 자식이 아비인 개판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는 갈 데까지 가서 깨춤 추고 있는 개판이 질서로 화 (化) 할 길은 없어 보인다.

이것은 운명이고 진화론이자 시대사조 (思潮) 다.

자기 소속 정당의 안과 밖을 구별해 바깥 부패는 감옥으로 보내고 안쪽 부패는 방면한대서야 개판은 영원히 끝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지지율로 보아 이회창씨가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리고 운명은 사람을 부리지만 사람이 운명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회창 대통령후보 뿐만 아니라 어떤 스타나 영웅도 '정관 (政官) 부패 없음 구조' 를 위해서는 단역밖에 맡지 못한다.

한편 3金 가운데 한 사람이 이번에도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어떻게 될까. 부패 때문에 수사받아야 할 대통령이 한 사람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DJ는 전.노, YS 뿐만 아니라 특히 자기를 포함하는 대사면 (大赦免) 을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실시할 역량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천만의 말씀이다.

자기도 구리면서 전.노를 잡아 넣은 사람과 자기가 구리니까 전.노를 풀어주겠다는 사람 사이에는 약고 어리석음의 차이는 있으나 국민을 속이는 뻔뻔함에서는 서로 똑같다.

전.노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그런 죄가 없기 때문에 전.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뿐이다.

'어리석은 나비가 시절 늦은 것을 모르니,가을 단풍을 봄꽃인 줄 알고 들락거리네 (치접부지시절만.痴蝶不知時節晩 만산홍엽방춘화.滿山紅葉彷春花)' 라는 말은 명성 높던 역술가 고 박재완옹이 제 발등 찍는 잘못을 저지르고는 문복 (問卜) 하러 온 손님에게 들려주곤 했다는 경구 (警句) 다.

부패는 이젠 그야말로 '시절만 (時節晩)' 이다.

한보철강사건은 부패의 전형이다.

그것이 터진 것은 이제 우리나라 경제일반이 그런 규모와 품질의 부패를 용납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이미 전환됐음을 뜻한다.

부패한 정치권이 돈을 빨아들이는 정치망 (定置網) 같은 불합리한 규제들도 시절에 너무 늦다.

정치의 부패가 경제의 고비용.저효율을 만들었고 지금 같은 구조적 경제대란을 가져온 최대원인이 되었다.

정보화.세계화하고 있는 우리 경제는 이 점을 자각하고 있다.

한국경제는 내년에는 어려움이 더 가중될 것이다.

경기의 호.불황 문제가 아니다.

국내외 금융기관과 기업 사이의 얽히고 설킨 대차관계 결제불능 상태란 카오스를 풀어 낼 방법이 금방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풀리려면 정치의 거대부패와 그 도구를 걷어 내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그래서 경제는 정계에서 움돋는 새 질서의 배아가 뿜는 기 (氣) 를 함께 숨쉬며 정치부패를 색출하는 일에 나설 것이다.

오늘의 경제 어려움을 만든 제1원인인 정치부패와 구체적 상징이기도 한 3金은 전직대통령이든 현직대통령이든 경제로부터의 거칠기 짝이 없는 문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경제란 무엇인가.

기업.소비자.근로자들이다.

강위석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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