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무림]제3부 6.공삼불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초로의 사내는 전동철마 (電動鐵馬)에서 내리자마자 누가 볼세라 황급히 문을 들어섰다.

“신복 (神卜) 계시오?

나요, 나. 내가 왔소이다. ”

그러자 곧 염소수염의 중늙은이가 나타나 초로의 사내를 맞았다.

“어이고, 이거 내로라하는 신한국방의 원로무림의원께서 어쩐 일로 이리 먼 걸음을 하셨소이까?” 염소수염의 중늙은이는 요상한 모자를 눌러쓰고 도사들이 입는 법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태극문양이 커다랗게 새겨있었다.

“내 긴히 여쭤볼게 있어 왔소. 도대체 누구요, 누가 이번 무림지존 비무에서 승자가 되는 거요?” “아, 일전에도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왜 또 물으십니까?” “회창객은 아무래도 틀렸어요. 그자가 이젠 공삼과도 전쟁을 시작했어요. 방은 산산조각 나기 직전입니다.

회창객은 자기 쪽에 서지 않는 자는 모두 내쫓을 기세고 민주련 동료들은 회창객을 버리고 인제거사와 힘을 합치자고 조르고. 미칠 지경입니다.

회창객편에 설 수도 없고 인제거사에게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을 나갈 수도 없으니. 내 하도 답답해서 신복을 다시 찾았소이다.”

“10월은 회창객에게 최악의 달입니다.

그러나 올해 회창객의 운세는 무수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격, 7월과 12월에 승천할 상입니다.

회창객이 이깁니다.”

“그럼 내가 회창객에게 가담해도 되겠소?

도대체 한치앞을 내다볼 수가 없어요. 이기는 쪽에 서야 할텐데 누가 이길지 영 알 수가 없으니 원. 골이 다 지끈거릴 지경입니다.

신한국방의 난다긴다하는 고수들중 나같이 고민하는 자가 50명은 될 겁니다.”

“그렇잖아도 이미 여러분이 다녀갔습니다.

내가 누굽니까?

무림최고의 신복아닙니까?

내 말을 믿으세요.” 박신복이 정색을 하며 눈살을 찌푸리자 초로의 사내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믿고 말고요. 그럼, 믿지요. 천하의 박신복을 못믿으면 누굴 믿겠소. 보통인마 (普通人馬) 수태우의 지존등극을 예언하고 포철공 (浦鐵公) 의 앞날을 족집게처럼 맞춘 박신복 아니오. 내 그럼 박신복의 말만 믿고 회창객 편에 서리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초로의 사내는 끝내 못 미더운 듯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며 문을 나섰다.

“아무래도 회창객은 아닌데 - .” 공삼은 발바닥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버릇 때문이었다.

속이 터지는 일이 있으면 한시도 쉬지 않고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버릇이 요 며칠간 유난히 도졌다.

회창객 때문이었다.

도대체 분하고 원통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회창객 그자가 감히 내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적반하장도 유분수고 주객이 전도돼도 어느 정도지, 날더러 방을 떠나라고?

있어 봤자 도움되는 것 하나 없으니 나가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공삼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누구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은 본래 공삼의 장기. 생전 누구에게 거꾸로 당해본 적이 없는 공삼인지라 분노가 더했다.

회창객으로선 도저히 대중검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참이다.

회창객을 쫓아내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 대중검자와 한판 싸움을 벌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인제거사며 조청천, 찬종검을 놓고 요모조모 따져보기도 하면서. 결론은 거의 내려졌었다.

모의 전투 결과 조청천은 대중검자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찬종검과 인제거사중 누구를 선택하느냐를 놓고 고심하던 단계였다.

찬종검은 후계자 비무에 참가하지 않은 유일한 고수였고 인제거사와는 달리 비무결과에 승복해 방의 단합에 앞장섰다.

게다가 무주공산인 영남무림 출신이었다.

방내 수하들의 반발만 무마할 수 있다면 찬종검이야말로 지금 신한국방의 위기를 구해낼 유일한 인물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한 공삼은 막 수하들을 부추겨 회창객을 쫓아낼 공작을 본격적으로 해나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회창객이 이를 눈치 채고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공삼은 어제 대중검자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대중검자가 시종일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자신을 쳐다보던 모습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 복장이 끓어올랐다.

회창객의 망발만 없었다면 나 공삼이 굳이 자존심을 상해가며 대중검자 따위를 만날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었다.

몇달만에 대중검자의 무공은 한층 높아져 있었다.

이제는 공삼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이대로라면 어떤 힘으로도 대중검자를 꺾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제거사의 배반도 싫고 회창객의 버릇없음도 싫다.

그러나 필생의 적수 대중검자가 지존좌에 올라서야 말이 되는가.

대중검자의 지존등극은 곧 공삼의 모든 치적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됨을 의미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방법은 세가지였다.

하나는 내각무림이요, 둘은 새 문파를 만드는 것이고, 셋은 회창객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확실치 않았다.

종필노사와의 내각무림은 명분도 시간도 없었다.

또 새 문파 창설은 재여무림의 힘을 사분오열시켜 결국 대중검자에게 어부지리만 안겨줄 위험이 컸다.

게다가 회창객은 결사항전의 태세.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공삼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자신의 힘이 빠진 탓이다.

힘만 있다면 이리저리 잴 필요도 없이 평소처럼 내키는 대로 해치우면 그만일 것이었다.

말년을 맞은 무림지존의 비애란 이런 것인가.

공삼에겐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 공삼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전동철마를 스쳐가는 풍경은 완연한 가을색이다.

경복궁을 지나 청와관으로 가는 길목에는 서리맞은 은행잎이 샛노랗다.

대중검자는 전동철마의 창문을 조금 열었다.

새벽 찬 공기가 코 끝에 닿는다.

한껏 숨을 들이켰다.

뱃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청와관의 새벽공기라 - .좋군, 좋아. 새해부터는 매일 아침 이 공기를 마시게 되리라. 오늘 공삼과의 만남은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공삼 이자가 회창객에게 당한 것이 억울하긴 꽤나 억울했던 모양이군. 관례를 무시하고 회창객을 제쳐둔 채 나부터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청와관에 도착해 공삼을 기다리는 대중검자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종필노사는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합방의사를 밝혔다.

대세가 나, 대중검자에게 이미 와있음이라. 즐거운 상념에 빠져있던 대중검자의 눈에 총총걸음으로 들어서는 공삼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오, 공삼거사. 그래 무슨 긴한 일이 있어 초야의 늙은이를 그리도 급히 찾으셨소이까?

이제까진 그렇게 한번 만나자고 해도 새색시마냥 빼기만 하더니만.” 공삼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였다.

막 아침 무공수련을 마친 터라 열기가 남은 탓이리라. “우리가 강호에선 비록 칼을 맞대고 겨뤘다 하나 30여년 고락을 함께 한 사이, 함께 나눌 얘기가 어디 한두마디겠소.” 두 사람은 가볍게 수인사를 나눴다.

대중검자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공삼은 슬쩍 내공을 주입했다.

대중검자는 가볍게 공삼의 손에서 뻗쳐오는 힘을 물리쳤다.

“허허, 이거 무림지존께선 여전히 장난을 즐기시는구려.” “검자의 내공이 이미 노화순정 (爐火純精)에 이른 듯합니다.

예전보다 한층 강해지신 것 같군요.” 공삼은 대중검자의 손에서 뻗쳐나오는 힘에 밀려 한발자국을 밀려났다.

대중검자가 중간에 힘을 거두지 않았다면 더 큰 낭패를 봤을 수도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리라. 나는 이번 지존비무대회에서 누구 편도 들지 않을 것이오. 바꿔 말해 검자께서 신한국방의 대표를 구워먹든 삶아먹든 나는 괘념치 않겠다는 뜻이오. 물론 신한국방에서도 손을 뗄 것이고. 이는 무림지존의 자리를 걸고 드리는 말씀이외다.”

굳은 표정으로 공삼이 말문을 열었다.

“어째 그 말씀은 날더러 대신 회창객을 공격해달라는 얘기로 들립니다만 -” “알아서 생각하십시오. 말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간여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입니다.”

“혹여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를테면 내가 회창객을 몰락시키는 동안 인제거사를 내세워 어부지리를 꾀한다든가 하는 - .”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실력과 무공을 겸비한 자가 무림지존이 되는 게 당연한 이치, 공삼은 음모와 암수로 이를 막을 뜻도 능력도 없소이다.”

대중검자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지요, 그래. 지당한 말씀이오. 내 진작부터 거사가 큰 통치를 할 것으로 믿고 있었소이다.”

계속되는 대중검자의 웃음에 공삼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공삼의 미소는 억지로 지어낸 듯 어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분통이 터지기로 말하면 회창객도 누구 못지 않았다.

쩨쩨하고 비열한 소인배같으니. 탈방도 안하겠다며 신한국방 방도 (幇徒) 임을 자처한 자가 신한국방 태상방주를 제쳐 놓고 대중검자와 먼저 만나?

그것도 무림의 관례를 깨고. 회창객이 공삼과의 회담을 단호히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자기 방의 대표를 해코지할 생각만 가득한 공삼과는 만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자신의 황금비리가 밝혀질까 무서워 대중검자의 황금남몰래숨겨두기공의 수사를 중지시킨 자가 무림지존이란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공삼에 동조해 실력으로 태상방주가 된 나를 단지 적보다 무공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물러나라고 외치는 무리들은 단호히 처단할 것이다.”

홀가분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무림지존좌를 차지할 확률은 전무했다.

이제 끝을 보리라. 애초에 공삼같은 위인을 끌어안고 가려던 것이 잘못이었다.

청원공이며 석재검자 모두가 공삼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고 있음을 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인제거사의 탈방도 공삼의 묵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공삼에겐 인제거사와 그의 아내 은숙선자의 사악 (邪惡) 무공을 낱낱이 밝힌 비급이 있었다.

그것을 들이댔다면 인제거사는 결코 탈방하지 못했을 터. 공삼에겐 다른 뜻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회창객도 그 비급의 사본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간 인제거사를 놔두고 대중검자만을 집중 공격한 것은 언제든 비급의 효력으로 인제거사를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공삼이 무림감찰의 수사를 중지시킨 것은 인제거사에게도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만천하에 인제거사의 죄상을 폭로한들 무림감찰이 수사를 포기하면 그만 아닌가.

이제부터 공삼이 나를 쫓아내기 위해 갖은 수를 내겠지만 결국 방을 떠나는 자는 공삼이 될 것이었다.

지금은 큰소리 치지만 방내 민주련 역시 결국 내게 굴복할 것이다.

대안이 없으므로. 지금은 요리조리 재고 있지만 갈 곳 없는 조청천도 내게 오리라. 그리고 곧 백성들은 알게 되리라. 누가 진정으로 새 무림을 만들 자인지. 철혈대제 박통의 후계자 종필노사와 힘을 합하고 무림정보부의 고위 밀사를 끌어들이는 등 오로지 무림지존좌에만 눈이 팔린 대중검자나, 신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탈방한 인제거사는 백성들의 혜안을 언제까지 가리지 못하리라. 그것만이 세력도, 도와줄 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에 빠진 재여무림 대표 회창객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끝을 보리라. 그리고 장렬히 산화하리라. 회창객의 다짐은 차라리 아무 기댈 곳 없는 자의 간절한 기도를 닮아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