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지간인 김남조(右) 시인과 신달자 시인이 나란히 시집을 냈다. 한지에 납활자로 인쇄한 시집이어서 더욱 뜻 깊다. 17일 산수유꽃이 활짝 핀 서울 소공동 원구단에서 두 사람이 시집 출간을 자축했다. [김성룡 기자]
“한복 차림에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강의실에 들어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첫눈에 반했달까,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매혹적이었죠. 아마 그때 이미 오늘 이 시간을 예감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제지간으로, 시업(詩業)에서는 동료로 49년째 인연의 끈을 이어온 두 사람이 최근 뜻 깊은 선물을 나란히 받아들었다. 1000년을 간다는 한지에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납 활자를 사용한 수제 시선집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김남조)와 『바람 멈추다』(신달자)를 각각 펴낸 것이다. 평생 고통과 영광의 흔적들 중 정수를 모아 인생의 황혼기에 영원한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일 게다.
두 사람의 감회와 근황이 궁금했다. 마침 22일은 김남조 시인이 한 문학모임에서 강연하는 날이다. 신달자 시인이 모시고 나섰다.
시선집을 위해 두 시인은 각각 잘된 시 100편씩만을 추리도록 ‘강요당했다’. 신 시인은 “내가 지금까지 펴낸 열두 권 시집 중 골라내야 했지만 어렵지 않았다. 어떤 시집에서 어떤 걸 골라야 하는지 시인이라면 누구나 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모두 열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1000여 편 중 100편을 골라야 했다. 김 시인은 “피가 주르륵 흐르는 감성의 상처들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옛 시를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시 쓰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았다는 토로다. 김 시인은 “누군가 ‘세월을 돌려줄 테니 다시 시를 쓰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이제 됐습니다’라고 답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단순한 사제관계를 뛰어넘는다. 신 시인이 77년 가톨릭 영세를 받을 때 김 시인은 대모였다. 신 시인은 “남편이 병마로 쓰러져 고통스럽던 시기에 성당에 다니게 된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김 시인이 부군 김세중(1928∼86·조각가)씨와 성당에 다닐 때 신 시인이 따라다니다 가톨릭과 친숙해졌다는 것이다. 문학의 선후배, 신앙생활의 동반자인 셈이다.
함께한 세월은 길지만 두 사람의 성격, 문학세계는 사뭇 다르다. 김 시인은 “달자는 영혼이 뜨겁다. 대학교 수학여행 때 빨간 스웨터를 입고 밤새 노래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선지 달자의 시는 치열하고 슬프며 숨이 콱콱 막힌다”고 평가했다. 신 시인은 “선생님의 시에서는 영성의 깊이가 느껴진다. 큰 소리 내지 않고도 꽉 찬 느낌을 주는 선생님 모습대로다”라고 했다. “시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정확히 일치했다. 김 시인은 “절실하고 정직하게 시 써야 한다”고 했고, 신 시인은 “아직까지 시만큼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김 시인이 “2007년 시집 출간 이후 새로 쓴 시가 30편쯤 된다”며 “60편 정도가 모이면 내년쯤 열일곱 번째 시집을 낼 생각”이라고 하자 신 시인이 덕담을 했다. “선생님, 스무 번째 시집까지 내세요.”
신준봉 기자
◆수제본 활판시집=시월출판사가 기록적 가치가 있는 원로 시인들의 작품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난해 8월 시작했다. 한지와 납 활자를 사용하고 조판·인쇄·제본을 모두 수작업으로 한다. 지금까지 이근배·정진규·김종해·오세영·허영자 시인의 시선집 등 7권이 출간됐다. 1000부 한정 인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