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동행 사제, 나란히 ‘창작의 정수’ 남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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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지간인 김남조(右) 시인과 신달자 시인이 나란히 시집을 냈다. 한지에 납활자로 인쇄한 시집이어서 더욱 뜻 깊다. 17일 산수유꽃이 활짝 핀 서울 소공동 원구단에서 두 사람이 시집 출간을 자축했다. [김성룡 기자]

 지금으로부터 꼭 48년 전의 일이다. 고교 백일장에서 이름을 날리던 신달자(66) 시인은 1961년 문학특기생으로 무시험 진학한 숙명여대 국문과에서 ‘평생의 은사’ 김남조(82) 시인을 처음 만났다.

“한복 차림에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강의실에 들어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첫눈에 반했달까,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매혹적이었죠. 아마 그때 이미 오늘 이 시간을 예감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제지간으로, 시업(詩業)에서는 동료로 49년째 인연의 끈을 이어온 두 사람이 최근 뜻 깊은 선물을 나란히 받아들었다. 1000년을 간다는 한지에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납 활자를 사용한 수제 시선집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김남조)와 『바람 멈추다』(신달자)를 각각 펴낸 것이다. 평생 고통과 영광의 흔적들 중 정수를 모아 인생의 황혼기에 영원한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일 게다.

두 사람의 감회와 근황이 궁금했다. 마침 22일은 김남조 시인이 한 문학모임에서 강연하는 날이다. 신달자 시인이 모시고 나섰다.

시선집을 위해 두 시인은 각각 잘된 시 100편씩만을 추리도록 ‘강요당했다’. 신 시인은 “내가 지금까지 펴낸 열두 권 시집 중 골라내야 했지만 어렵지 않았다. 어떤 시집에서 어떤 걸 골라야 하는지 시인이라면 누구나 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모두 열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1000여 편 중 100편을 골라야 했다. 김 시인은 “피가 주르륵 흐르는 감성의 상처들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옛 시를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시 쓰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았다는 토로다. 김 시인은 “누군가 ‘세월을 돌려줄 테니 다시 시를 쓰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이제 됐습니다’라고 답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단순한 사제관계를 뛰어넘는다. 신 시인이 77년 가톨릭 영세를 받을 때 김 시인은 대모였다. 신 시인은 “남편이 병마로 쓰러져 고통스럽던 시기에 성당에 다니게 된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김 시인이 부군 김세중(1928∼86·조각가)씨와 성당에 다닐 때 신 시인이 따라다니다 가톨릭과 친숙해졌다는 것이다. 문학의 선후배, 신앙생활의 동반자인 셈이다.

함께한 세월은 길지만 두 사람의 성격, 문학세계는 사뭇 다르다. 김 시인은 “달자는 영혼이 뜨겁다. 대학교 수학여행 때 빨간 스웨터를 입고 밤새 노래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선지 달자의 시는 치열하고 슬프며 숨이 콱콱 막힌다”고 평가했다. 신 시인은 “선생님의 시에서는 영성의 깊이가 느껴진다. 큰 소리 내지 않고도 꽉 찬 느낌을 주는 선생님 모습대로다”라고 했다. “시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정확히 일치했다. 김 시인은 “절실하고 정직하게 시 써야 한다”고 했고, 신 시인은 “아직까지 시만큼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김 시인이 “2007년 시집 출간 이후 새로 쓴 시가 30편쯤 된다”며 “60편 정도가 모이면 내년쯤 열일곱 번째 시집을 낼 생각”이라고 하자 신 시인이 덕담을 했다. “선생님, 스무 번째 시집까지 내세요.” 

신준봉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수제본 활판시집=시월출판사가 기록적 가치가 있는 원로 시인들의 작품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난해 8월 시작했다. 한지와 납 활자를 사용하고 조판·인쇄·제본을 모두 수작업으로 한다. 지금까지 이근배·정진규·김종해·오세영·허영자 시인의 시선집 등 7권이 출간됐다. 1000부 한정 인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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