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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긴 연주시간이 지루하다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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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치다 만 것 같아 싱거워요.”
얼마 전 한 피아니스트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연주하고 나서 한 말입니다. 30분 정도 되는 길이의 곡이죠. 보통 40분에서 한 시간까지 되는 다른 협주곡에 비해 짧은 느낌이 듭니다. 클래식 음악은 다른 장르에 비해 연주 시간이 긴 편입니다. 그래서 가요 7~8곡이 연주될 30분을 클래식 연주자들은 ‘싱거운 길이’라고 하는 것이죠.

공연장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릅니다. 무대 위 시간은 빠르게 가지만 객석에서는 몸을 비트는 사람이 하나 둘 나옵니다. 딴생각도 하고, 눈도 붙이죠. 무대와 객석 사이의 차이는 뭘까요?

답은 이해의 정도입니다. 몇 달, 몇 년 동안 같은 음악을 공부하고 연습한 연주자들은 30분이 3분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한번 와봤던 길이 짧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그런데 전혀 모르는 음악을 들으면 지도를 잃어버린 여행객처럼 딴생각 속으로 방황하게 되는 것이죠.

이달 14~15일 독일의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42)의 공연에 가보신 분이라면 그 ‘지도’를 찾을 수 있으셨을 겁니다. 세종문화회관의 세종체임버홀은 객석 조명의 밝기를 35%(완전히 밝힌 상태를 100%로 봤을 때)로 맞췄습니다. 60%였던 무대의 조도(照度)와 별로 차이가 안 났죠. 본래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만 환하고 객석은 컴컴해야 하는데, 이날은 객석도 환했습니다. 괴르네가 눈부신 조명을 불평하며 무대의 조도를 낮춰 달라고 했고, 상대적으로 객석이 밝아졌던 겁니다.

청중은 이득을 봤습니다. 프로그램 책자에 나와 있는 글을 공연 중에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괴르네는 전형적인 독일 가곡 전문 가수입니다. 괴테·하이네·실러 등 대문호의 문학작품인 노랫말은 이날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고, 그 텍스트를 들고 청중은 행복한 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청중은 ‘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악곡의 가사를 유난스럽게 꼼꼼히 보며 듣는 사람도 거의 없고, 프로그램에 적힌 곡 설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듣는 사람도 적은 편입니다.

외국의 공연장에서는 악보까지 들고 와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글이나 악보를 읽으며 들으면 감상의 짜릿함이 시작됩니다. 젊은 시절 연인의 이름 ‘ABEGG(아베크)’를 음 이름에 대응시켜서 곡을 쓴 슈만, 연주 여행을 떠난 파리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유일한 단조(短調) 피아노 소나타를 남긴 모차르트 등 작곡가와 진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수학의 천재였던 바흐가 멜로디 하나를 놓고 거꾸로, 혹은 두 배로 느리게 연주하게 하면서 진행이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연출’하는 것도 악보나 설명과 함께 들으면 한눈에 보이고 들립니다. 읽지 않고, 이런 기막힌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A.읽으세요

김호정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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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호정- 중앙일보 문화부의 클래식·국악 담당 기자. 사흘에 한 번꼴로 공연장을 다니며, 클래식 음악에 대한 모든 질문이 무식하거나 창피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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