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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7>신춘문예 증후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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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13면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의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

1970년대가 눈앞에 다가온 69년 12월 초의 어느 날. 신춘문예 응모작 접수 마감일로 분주한 신문사 문화부에 한 청년이 소설 원고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와 데스크 앞에 섰다. 여러 해에 걸친 신춘문예 단골 낙방생으로 이미 데스크와 친숙해진 청년은 비장하게 말했다.

“이번이 꼭 열 번쨉니다. 이젠 지쳤어요. 이번에 또 실패하면 소설가 포기하렵니다.”
그는 소설 원고를 내던지듯 응모작 원고 더미 위에 올려놓은 다음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지만 70년 1월 1일자 중앙일보에는 그의 이름과 당선작이 버젓이 실려 있었다. 조해일의 ‘매일 죽는 사람’이었다.

62년 대학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김승옥이나 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한 최인호처럼 첫 응모에서 뜻을 이룬 문학 지망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신춘문예 응모를 시작하게 되면 낙방이 거듭될수록 오기가 생겨 투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신춘문예 중독’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 무렵 대구에 사는 한 40대 소설가 지망생은 응모 작품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첨부해 우송했다.

“…십대 후반부터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불혹의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된다는 생각보다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강한데도 어찌 된 일인지 ‘신춘문예 시즌’만 되면 모든 일 작파하고 소설 쓰는 일에만 매달리게 되니 제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쓰고 나서 ‘차라리 응모할 수 있는 연령을 30대까지로 낮추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70년대 초 신춘문예 작품을 모집하는 신문사는 몇몇 지방신문을 포함한 10여 개 사였고, 응모 작품은 매년 5~8개 분야에 걸쳐 줄잡아 수만 편에 달했다. 시·시조 등 운문은 3~5편씩 쓰도록 돼 있고, 복수 응모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림잡아 매년 수천 명이 ‘신춘문예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렇다 할 재능도 없이 헛되게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문학 지망생이 많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대 일의 관문을 뚫고 어렵사리 당선의 영예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인으로서의 장래까지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선 출판 사정은 열악할 대로 열악한 데다 그들의 활동무대가 돼 줘야 할 ‘월간문학’과 ‘현대문학’ 등 두 종합문예지가 당장 신춘문예 출신들을 문인으로 대우해 주지 않아 제도권 문단에 설 자리를 마련할 수 없었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몇몇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곧바로 문인협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없어 그 기관지인 ‘월간문학’에는 작품 발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정통 보수 종합 문예지임을 자처하는 ‘현대문학’ 역시 신춘문예의 관문을 통과한 문인들에게는 지면을 제공하지 않았다. 자체 내에 추천제도가 있으니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하더라도 다시 추천을 받아 ‘재검증’의 절차를 밟으라는 것이었다.

김승옥의 경우 신춘문예 당선 후 작품을 들고 ‘현대문학’을 찾아가 실어 줄 것을 요청했다가 추천 형식으로 실어 주겠다는 ‘현대문학’ 측의 제의를 깨끗이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 속이 상할 대로 상한 김승옥은 일평생 ‘현대문학’에는 작품 발표를 하지 않겠다는 독한 말을 내뱉었다. 반면 최인호는 추천의 형식으로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했다. ‘추천이든 뭐든 작품으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70년대 들어서도 문단의 그런 사정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았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춘문예 출신 문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몇몇 소설가가 제도권 문단에 기대지 않고서도 작품만을 가지고 대중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의 대중화 현상’이냐, 아니면 ‘대중문학 현상’이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한 이른바 ‘70년대 작가’들이 그들이었다.

이미 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최인호를 비롯해 70년 중앙일보의 조해일과 조선일보의 황석영, 72년 동아일보의 한수산과 73년 중앙일보의 박범신 등인데 ‘70년대 작가’에 포함되면서도 신춘문예 출신이 아닌 작가가 김주영과 조선작이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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