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홍일점' 아시아계 호주감독 폴린 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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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80년대초, 홍콩을 떠나 영화감독이 된 사람, 폴린 챈. 그는 7백80여명의 회원이 등록된 호주감독협회의 유일한 아시아계 회원이다.

지난 93년 장편데뷔작 '덫 (Traps)' 이 호주 국내와 미국.유럽.일본에서 잇따라 개봉되면서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은 그는 지난해 TV용 영화 '작은 선의의 거짓말 (Little White Lies)' 을 선보였다.

세번째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 중인 그를 시드니의 한 아파트에서 만났다.

멀리서 찾아온 동양인에 대한 환대를 아끼지 않았지만 이면에는 홍콩에서부터 시작된 '불안' 이 엿보였다.

“영화 일은 홍콩에서부터 시작했다.

배우로서 3년동안. 작은할아버지는 흑백영화시대의 유명한 배우였고, 어머니도 배우였다.

남동생은 지금도 홍콩에서 영화제작을 한다.

가족과 함께 처음 이민왔을 때, 배우로서 일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직접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첫 작품이 호주의 중국인 사회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러나 내 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였고, 그래서 영화학교에 들어갔다.”

그녀가 간 곳은 '호주 영화.TV.라디오 학교' .호주의 영화 르네상스 기수인 피터 와이어 ( '행잉 록에서의 소풍' '죽은 시인의 사회' '위트니스' 감독)에서 뉴질랜드 출신 제인 캠피온 ( '피아노' '내 책상 위의 천사' 감독) 까지 이쪽 영화계의 내로라 하는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폴린 챈은 여기서 그의 정신적 스승격인 '꼬마돼지 베이브' 의 감독 크리스 누넌을 만난다.

그에게서 얻은 가장 큰 지원은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대우' 였다.

“내가 1940년대 호주를 무대로 단편영화를 만들려 하자, 한 교수는 '너는 그때 여기에 있지도 않았다' 며 그만두라고 말했다.

나는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 라고 반박했다.

그런 생각이라면, 이탈리아 감독 베르톨루치가 어떻게 '마지막 황제' 를 만들고, 호주의 감독 질리안 암스트롱이 어떻게 '작은 아씨들' 을 만드나. ”

그녀의 두번째 영화 '작은 선의의 거짓말' 은 정치가의 아내가 주인공. 익명의 협박편지를 받는 주인공의 불안심리에는 가정주부 역할에 매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갑갑증이 극단적으로 투영된다.

폴린 챈은 그런 주인공의 불안이, 이곳 호주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에 갔더라면 지내기는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대학도 거기서 나왔었고, 친구들도 있고. 하지만 이런 영화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덫' 의 제작비로 3백50만 호주달러 (약 23억원)가 들었다.

미국에서는 영화제작에 엄두도 못내는 금액이다. 사실 나는 '스피드3' 같은 걸 만들 생각은 없다.

홍콩도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다.

호주에는 예술영화에 돈을 대려는 제작자와 관객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그런 점에서 호주에 오게 된 것은 행운이다.”

홍콩에서 시작된 그녀의 불안은 호주 땅 한켠에서 그렇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시드니 =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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