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4> 대법관이란 자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2면

서울특별시 서초동 지하철 2호선 서초역 네거리에 위치한 ‘하얀 거탑’을 아시나요. 대법원 출입기자인 저에겐 드라마에서 병원을 의미했던 하얀거탑이 대법원에 더 어울리는 말 같습니다. 신성(神性)에 가까운 권위를 인정받고, 또 인정받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대법원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신영철 대법관이 법원장 시절 판사들에게 보낸 e-메일 때문입니다. 대법원은 진상조사단을 꾸려 신 대법관의 행동이 재판 관여로 볼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윤리위원회에 회부했습니다. 최종적인 정의와 진실을 제시하는 대법관에 대한 사소한 불신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법관의 역할과 위상은 어떤 것인지 살펴봤습니다.

김승현 기자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법조계에는 ‘대법원의 판결은 틀려도 맞다’는 말이 있다. 대법원의 판결은 한국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최종적인 정의이고 진실이란 얘기다. 대법관은 한국 사회의 마지막 심판이다. ‘우리의 법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최종 판례를 그들이 만든다. 그런 판결을 위해 대법관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낸다. 1, 2심 판결에 불복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지만 대법원 판결 이후엔 승복해야 한다.

먼저 임명된 사람이 서열 높아

대법원에는 14명의 대법관이 있다. 대부분 30년 가까이 판사 생활을 했지만 검사(안대희 대법관), 교수(양창수 대법관) 출신도 포진해 있다. 여성 대법관은 두 명이다. 먼저 임명된 대법관의 서열이 높다. 동시에 임명됐을 때는 연장자가 선임이 된다.

대법관이라는 명칭은 1987년 헌법이 개정되면서부터 사용됐다. 이전엔 대법원 판사였다. 상고심 재판은 12명의 대법관이 주로 맡는다.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 재판에만 참여한다. 대법관 중 법원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에 관여하지 않는다. 12명의 대법관은 4명씩 3개의 소부를 구성한다. 대법원 1, 2, 3부가 있다. 소부 판결은 만장일치로 이뤄진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전원합의체로 사건이 넘겨진다. 판례 변경이 필요할 때에도 전원합의체로 판결을 넘겨 대법관 13명의 다수결로 판결한다.

대법원의 기능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상고심 판결을 통해 ▶전국적인 법령의 해석과 적용을 통일하고 ▶사건을 재심리해 사회 정의와 형평을 실현하며 ▶하급심의 잘못을 바로잡아 개인의 권리를 구제하는 것이다.

여성 상속 인정하고, 젠더 호적 고치고

2005년 7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성인 남자만을 종중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양성 평등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수십 년간 계속된 관습법을 깬 것이다. 이 소송은 종중 소유의 땅을 판 돈을 기혼 여성들은 한 푼도 받지 못하자 제기된 ‘딸들의 반란’이었다. 앞선 수십 년간의 판례에서 “종중은 공동 선조의 후손 중 성년 이상의 남자를 종원으로 하며, 여자는 종중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대법관 7 대 6의 의견으로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2006년 6월 트랜스젠더(성전환자)들의 호적 정정을 인정했다. 하급심에서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A씨의 호적 정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하급심 결정을 파기했다.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두 명의 대법관은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대법원 결정이 나오자 병무청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호적을 바꾸면 병역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후속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체벌, 70년대엔 무죄 90년대엔 유죄

대법원 판결은 시대를 닮는다. 판결은 사회적 상황과 상호 의존성이 있다. 대법원이 판례에서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라고 했을 때 그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76년 대법원은 교칙을 어긴 중학생의 뺨을 때린 학교 교감에게 무죄 판결을 했다. 체벌을 정당행위로 본 것이다. 90년엔 나무 지휘봉으로 초등학생을 체벌하다가 허리 부분을 때려 전치 6주의 부상을 입힌 교사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교육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의 적절한 징계 수단’이 어디까지인지는 그 시대의 대법관들이 판단한다. 최근 대법원은 유흥주점에서 여성 종업원이 손님에게 신체 접촉이나 노출을 한 것이 처벌 대상인 음란행위가 아니라는 판결을 했다. 대법원은 “‘음란’이라는 개념은 사회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유동적”이라고 밝혔다.

늘어나는 1인당 담당 사건수

2003년 1500여 건이던 대법관 1인당 사건 수는 최근에는 연간 2400건에 육박하고 있다. 그래서 대법관이 일정한 중요 사건만을 재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고 법원으로서 위상에 맞게 재판 대상을 ‘선택과 집중’해서 대법관 1인당 사건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권리구제형 상고 사건과 법령의 최종적 해석이 필요한 사건을 구분하고, 권리구제형 상고 사건은 상고 법원을 신설해 전담시키는 방안 등이 연구되고 있다.



예우는 장관급, 의전은 총리급

대법관은 최고 법관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 모든 예우는 행정부의 장관과 같고 해외 출장 때에는 국무총리급 의전이 이뤄진다. 대형 승용차(에쿠스·체어맨 등)가 주어지나 관사(官舍)는 없다. 대법관과 비슷한 예우를 받는 직위로는 장관 이외에 감사원장, 검찰총장, 군의 대장 등이 있다. 대법관은 탄핵되거나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으면 파면되지 않는다.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 있게 판결할 수 있도록 신분을 보장하는 것이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 취지에 따른 것이다. 15년 이상 판사ㆍ검사ㆍ변호사 또는 법률이 정하는 이에 준하는 직에 있던 40세 이상의 사람 중에 임명한다. 임기는 6년이며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은 연임할 수 있다. 임기 내라도 정년이 되면 퇴직해야 한다. 대법원장의 정년은 70세, 대법관은 65세, 다른 판사는 63세다. 올해 67세인 이용훈 대법원장의 임기는 2011년 9월까지다. 대법관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포함해 총 14명이다.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대법관의 월급은 594만6800원(본봉)으로 행정부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580여만원)의 보수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본봉 이외에 각종 수당을 합치면 대법관의 세전 연봉은 1억원을 조금 넘는다. 대법원장의 월급은 839만6000원으로 일반 대법관보다 많다. 대법원장은 서울 한남동에 공관도 있다.

대법관의 업무량은 주어지는 혜택만큼이나 많다. 대법원은 1년에 약 2만9000여 건의 크고 작은 사건을 심리한다. 전원합의체 재판에만 참여하는 대법원장과 행정직인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하면 1인당 2400여 건을 처리하는 셈이다. 이를 위해 각 대법관은 재판연구관 3명, 비서관 1명, 사무직원 2명의 지원을 받는다.

재판연구관은 사건을 요약하고 법리 분석을 해 대법관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 재판연구관 3명 중 1명은 지방법원 부장판사다. 과거에는 평판사 두 명뿐이었는데 8년 전부터 부장 연구관을 둬 책임을 강화했다.

매달 셋째 주 목요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하고 나면 대법관 14명은 통상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인근에서 회식을 한다. 모두가 사석에서 모이는 유일한 자리다. 재판 얘기보다는 소소한 얘기를 나눈다고 한다. 전원합의체 법정에서는 대법원장이 중앙에 앉고 임명 시기 순으로 가장 선임인 김영란 대법관이 그 오른쪽에, 다음 순번인 양승태 대법관이 대법원장의 왼쪽에 앉는 식으로 자리를 한다.

박성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