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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무림]제3부 4.보보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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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싸움은 끝났소. 이겼소이다.

이젠 향후 천하무림을 어떻게 다스릴까 궁리하는 일만 남았소.” 대중검자가 파안대소했다.

종로검 종찬소검자는 다소 의외였다.

그가 알기로 대중검자는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위인이었다.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득실을 따진 뒤에야 움직일 사람, 그게 알려진 대중검자의 모습이었다.

두달 가까이 새국민회의 세력이 줄곧 독보천하할 때도 그는 수하들에게 입조심.몸조심을 명했었다.

'방심은 이르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 그는 늘 이렇게 말해왔다.

천하인 모두가 대중검자의 승리를 말할 때도 대중검자 자신만은 '때가 이르다' 고 얘기했다.

그런 그가, 이겼다는 말을 스스로 했다.

그것도 파안대소와 함께. “경하드립니다, 주군. 주군의 그 말씀은 어떤 힘으로도 이제는 주군의 지존좌 등극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맞소이다.

회창객은 두가지 큰 실수를 했소. 그것이 그를 회생불능의 상태로 몰아넣을 것이고 내 지존행을 완벽히 도와줄 것이오. ” 종찬소검자가 짐짓 의아한 표정을 짓자 대중검자는 득의의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하나는 백성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이오. 역대 무림지존이 하나같이 갖은 암계로 나를 음해했으되 나는 살아남았소. 또 그 사실을 강호의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소. 나를 따르는 민심은 요지부동이오. 어설픈 암수 (暗數) 론 자신의 무덤을 팔 뿐이지. 회창객은 그 점을 간과했던 것이오. 황금전쟁이 시작된 이후 내 세력은 오히려 늘고 신한국방의 세력은 줄었소. 이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겠소?” “옳으신 말씀.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황금전쟁으로 스스로의 발에 족쇄를 채웠다는 점이오. 재여무림은 황금을 뿌린 만큼 움직이는 조직, 결코 황금 없이는 굴러가지 않소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황금 씀씀이를 무림감찰에 무고한 자가 어찌 자신의 수하들에게 황금을 뿌려대겠소. ” “하긴 요즘 재여무림의 무리들을 보면 꼭 굶어죽기 직전의 거렁뱅이들 같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요. 회창객이 황금을 쓰지 않는다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사실 황금살포공이 아니라면 재여무림이 기사회생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겠지요. 그럼 이제 회창객에겐 손발을 묶고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겠군요?” “최후의 발악이야 어찌 없겠소. 그래봤자 무림감찰을 부추기고 내 나이와 건강을 문제삼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오. 바둑으로 치면 던질 곳을 찾는다고나 할까. ” “그나저나 무림감찰에 그자들이 정식으로 주군을 밀고했으니 우리도 반격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걱정할 것 없소. 무림감찰의 포사 (捕仕) 중엔 나를 따르는 무리들이 더 많소. 그들은 절대 회창객의 사주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우린 그저 가만있으면 됩니다.

회창객이 스스로 패착을 두고 있으니. ” “공삼이 직접 나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공삼은 움직일 수 없소이다.

그가 움직이면 천하의 모든 세력이 그를 공격할 것이오. 또 공삼이 무림감찰을 움직이려면 지난 무림지존 비무때 자신이 황금살포공을 펼친 사실을 자백해야 하오. 그러나 그는 절대 그런 위험부담을 안지 않을 것이오. ” “혹여 이러다가 회창객이 낙마라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되면 큰일인데…. ” “그것도 염려할 것 없소. 회창객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를 강제로 쫓아낼 수는 없소.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날 위인이 아니오. 최악의 경우, 회창객이 낙마한다 해도 재여무림엔 대안이 없소이다.

인제거사는 탈방후 신한국방과 공삼을 욕하고 멀리하고 있소. 배덕자에게 다시 중임을 맡긴다면 천하인 모두가 손가락질할 것이오. 유일하게 한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공삼이 조청천과 손을 잡는 경우요. 그러나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소이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인제거사와 조청천, 나 세사람의 정족지세가 될터이니 나의 승리에는 변함이 없소. 세사람의 겨룸이라면 필승이니까. ” “하긴 황금전쟁이 시작되면서 종필노사도 결심이 선 모양입니다.

3김무림 청산을 선언하고 나선 회창객이 너무 꼴보기 싫다는 뜻이겠지요. 종필노사가 가세하고 재여무림의 손발은 묶이고, 하하 - .저희 새국민회의 오랜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지는군요. ” “그렇소. 어떤 경우에도 우린 승리하게 되어 있소. ”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대중검자는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다시 파안대소를 터뜨리는 순간, 대중검자의 신형이 한차례 비틀거렸다.

함께 웃던 종찬소검자가 깜짝 놀라 대중검자를 부축했다.

“주군, 어쩐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최근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오. 잠시 어지럼증이 생겼을 뿐이오. 괜찮소. 심려 마시오. ”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 앉는 대중검자를 지켜보는 종찬소검자의 미간에 한줄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갔다.

회창객은 만심이 끓어올랐다.

견디다 못한 그는 구기옥의 뜨락으로 나섰다.

제법 차가운 밤공기가 가슴의 열기를 조금 식혀주는 듯했다.

보름을 지난 달빛은 여전히 교교했다.

그러나 만추의 정취만으로 풀어지기엔 회창객의 심사가 너무 복잡했다.

그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곤 나직이 시 한 수를 읊조렸다.

丈夫六十 去筆握劍

장부 나이 육십에 붓놓고 검들어

出師武林 以立天下

무림에 뛰어들어 천하를 세우려 했네

步步刀山, 處處劍林

걸음걸음이 칼산이요, 곳곳이 검숲이라 民心一去不復返

한번 떠난 민심은 영 돌아오지 않네

百謨天慮爲無爲

백가지 생각, 천가지 궁리가 소용없으니 氣盡力絶無出路

기운 다하고 힘 빠져 나갈 길 보이지 않네 何處求藥治亂世

어디서 영약을 구해 난세를 다스릴까

시 한수를 마친 회창객은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황금전쟁은 그와 신한국방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그러나 싸움은 지리해지고 기대했던 효과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 대중검자의 기세를 꺾고 인제거사의 발호를 막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다.

얻는 것 작고 잃은 것 많다 하나 이젠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 멈출 수 없었다.

싸움의 끝을 보리라. 결국 공삼거사가 열쇠였다.

공삼의 황금살포공을 까발리지 않고는 대중검자에 대한 공격도 제대로 먹혀들지 않을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

회창객은 마음을 다져먹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공삼과의 싸움 덕분이 아니었던가.

공삼에게 최후통보를 하리라. 그러나 공삼이 반발하면?

회창객의 가슴앓이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공삼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힘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회창객에겐 그럴 만한 힘도 세력도 없었다.

무림초행인 그가 본래의 무공을 잃고 좌충우돌하는 사이, 그나마 있던 세력마저 크게 약화됐다.

비록 태상방주의 신분이라 하나 신한국방 내에서 그와 함께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들 수하는 많지 않았다.

방의 실제 주인은 여전히 공삼이었다.

자칫 공삼의 분노를 샀다간 자신이 천길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회창객에겐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판을 뒤흔들지 않고는 패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멈출 수 없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돼도 멈출 수 없다.

차라리 장렬히 산화하리라. 회창객은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등을 살며시 껴안았다.

그의 아내 인옥선자였다.

지존 싸움에서 세번째로 밀려난 그 자신과는 달리 차기 지존무후감으로 백성들이 첫손을 꼽는 사람이었다.

“너무 심려 마세요. 만시지탄이 있긴 하나 찬종검이 가세하고 덕룡공도 돕겠다고 하잖아요. 곧 방이 제자리를 찾고 잃었던 세력을 되찾게 될 거예요.” “옳은 말이오. 그러나 그들이 딴 뜻을 품지 않았음을 그 누가 알겠소?

또 설령 그들이 충심으로 돕는다 해도 결국 최후의 싸움은 나 혼자 하는 것이니. ” 인옥선자가 몸을 돌려 회창객의 손을 잡았다.

“시련은 약자에겐 좌절을, 강자에겐 기회를 주는 법, 큰 승리 뒤에는 늘 큰 시련이 따른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싸우세요. ” “고맙소. 내 그대에게 맹세컨대 대중검자에게 중원을 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약속하리다.”

아내의 손을 으스러져라 마주잡으며 회창객이 말했다.

그 손을 놓치면 천하를 놓치기라도 하듯. 조청천의 찌푸려진 미간은 좀체 펴지지 않을 듯했다.

두달전 출사표를 던질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이름이 위진천하 (威振天下 : 위세가 천하를 울림)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의 세력은 형편없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황금전쟁이 시작된 후 적들의 혼란을 틈타 일부 세력을 회복했다 하나 천하를 아우르기엔 아직 한참의 거리가 있었다.

모든 게 인제거사 때문이었다.

인제거사는 조청천 자신과는 극성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인제거사의 청룡사자후는 만인전시기 (萬人電視機) 를 통해 강호백성들의 안방을 속속 점령해갔다.

그러나 조청천은 음공 (音功) 엔 아예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다.

조청천의 경제원론공은 인제거사의 번지르르한 음공으로 포장된 세대교체공 앞에 맥을 못추었다.

게다가 그자, 인제거사는 요즘들어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투항할 것을 강요해오고 있었다.

조청천은 다급해졌다.

그가 강호의 온갖 고수들을 찾아 직접 비무행에 나선 것은 다 그 때문이었다.

당금 강호에는 대중검자나 회창객과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전 석재공은 그런 세력들을 모아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보자고 제의해 왔다.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 조청천은 흔쾌히 수락했다.

황금전쟁이 피비린내를 물씬 풍길 이달말이면 누군가 곤두박질하리라. 무림의 판이 다시 짜이리라. 본격 승부는 그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었다.

조청천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 판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그러자면 역시 자신의 무공과 극성이 되는 인제거사가 걸림돌이었다.

조청천이 최근 인제거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인제거사는 무림고수들에 대한 포섭과 회유를 중지했다.

기대했던 신한국방 고수들이 자신의 새 문파에 입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고 있었다.

공삼의 아들인 현철소왕자의 수하들이 인제거사에게 합류한 흔적도 있었다.

때문에 인제거사는 황금전쟁 말미에 공삼이 신한국방을 통째로 들어 자신에게 안겨주리라 믿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 똑똑히 알려주리라. 조청천은 두달전 공삼과의 밀약을 떠올렸다.

아무리 신의를 헌신짝처럼 여기는 공삼이라 하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면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오리라. 그때 세불리를 딛고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조청천의 신화를 백성들은 다시 보게 되리라. 한성판윤 비무때와 같이. 이번엔 공삼의 힘을 밑거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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