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통화폭락 100일] 中.수입상품 판매중단 속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싱가포르.콸라룸푸르.방콕.자카르타 = 김종수 기자]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체인수가 많은 수퍼마켓인 헤로 (Hero) 의 진열대에 놓인 상품에는 가격표가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5개까지 붙어있다.

그동안 환율이 바뀔때마다 루피아화로 표시된 값을 올리다 보니 가격표가 덕지덕지 붙게된 것이다.

이 수퍼마켓은 이달들어서는 아예 가격표를 새로 붙이지 않는다.

"가격표를 붙이는 동안 루피아값이 또 떨어지는데 붙이면 뭘하느냐" 는게 체인관리자의 설명이다.

수입상품값이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수입원자재 비중이 높은 국산제품들의 값도 덩달아 뛰고 있다.

수입상품은 값을 얼마를 받아야 될지 몰라 아예 판매를 중단한 사례도 많다.

산유국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아직 기름값을 올리지 않고 있으나 석유를 수입해다 쓰는 태국과 필리핀은 유가 상승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태국은 이미 9월부터 휘발유값을 10% 인상했고 필리핀도 이달 들어 기름값을 전반적으로 인상했다.

마닐라를 비롯한 필리핀 주요도시에선 7일부터 대중교통수단인 버스와 '지피' 운전사들이 기름값 인상에 항의하는 파업에 돌입해 교통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사정이 다급해지자 필리핀 최고법원은 정유사들에 대해 앞으로 30일간 일체의 석유류 가격인상을 금지하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대우 말레이시아 현지법인의 이만재 지사장은 요즘 영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수입상들의 주문이 뚝 끊어진 탓도 있지만 가격조건을 정할 수 없다는게 더 큰 이유다.

자칫 잘못하면 물건을 팔고도 이익을 남기는 커녕 손해를 보기 십상이기 대문이다.

李사장은 환율이 안정되기 전에는 기존 계약분이외에 영업을 확대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고 말했다.

통화폭락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은 미달러화로 외채를 들여온 기업들과 금융기관들. 태국의 파이낸스회사들은 이미 누적된 부실채권과 달러부채의 부담을 못이겨 영업정지상태에 들어갔다.

인도네시아 금융가에선 일부 국책은행을 포함한 부실금융기관들이 채무불이행에 빠질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정부가 쉬쉬하며 발표를 미루고 있으나 이미 몇몇 금융기관과 중견기업이 이자를 제대로 못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통화폭락의 후유증은 금융기관들의 대출기피와 천정부지로 치솟는 금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태국의 주요은행들은 신규대출을 거의 중단하고 기존 대출금도 조기회수에 나섰다.

기업들은 금리를 불문하고 돈을 구하러 다니지만 선뜻 돈을 대주겠다는 금융기관을 찾기가 어렵다.

방콕에 지점개설을 준비중이던 산업은행은 허가를 받아놓고도 석달째 개점을 미루고 있다.

오재영 사무소장은 "이달말쯤 개점할 계획이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당분간 영업확대는 기대할 수 없다" 고 잘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자카르타의 익일물 은행간 금리는 지난 7월 18%에서, 최근에는 40%를 넘나들고 있다.

개인대출 금리는 연리 55%를 넘게 부르는 곳도 생겨났다.

마닐라에선 사정이 더 심각하다.

지난 7일 하루짜리 은행간금리는 1백7%라는 기록적인 수준으로 올랐다.

싱가포르의 한 금융전문가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우 "금융비용이 치솟아 내수기업들의 도산이 늘어나고 금융기관들의 부실도 그만큼 커질 것" 이라고 진단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