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아씨,그후 27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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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씨가 걷는 이 길은 옛날에 꽃가마 타고 시집 온 길이다.

말탄 임이 앞장선 이 길에는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한세상 다하여 다시 돌아가는 이 길엔 날이 저물고 하늘가의 노을도 서러웠다.

이미자 (李美子) 의 애절한 목소리에 실은 이런 뜻의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밤이면 집집마다 식구들이 TV 앞에 모여든다.

TV에는 엄격한 가부장제 아래서 처첩제가 당연시되던 시절에 오로지 인종 (忍從) 을 미덕으로 여겨야 하는 한국 여인의 삶이 그려진다.

온 방안은 한숨과 눈물의 바다, 비분강개 (悲憤慷慨) 해본들 어쩔 것인가, 그 여인이 산 길이 곧 우리의 역사인 것을. 우리의 딸, 우리의 며느리, 우리의 아내,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할머니들은 이런 고통을 겪으며 세월을 이겨냈구나. '아씨' 는 동양방송 (TBC) 이 1970년 3월2일부터 이듬해 1월9일까지 꼬박 열달동안 방송한 매일연속극이다.

2백53회에 걸쳐 방송된 이 드라마는 1910년대에서 70년대초까지 60년 가까이 한국 근대화의 격동기를 산 한 여인의 일생을 담담하게 그렸다.

가족 모두가 TV 앞에 늘어붙게 되자 방송사측은 문단속을 잘 했는지, 수도꼭지는 잠가져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달라는 광고방송을 해야 했다.

'아씨' 의 시청률은 평균 80%,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고 방송사 (放送史) 는 기록하고 있다.

이 '아씨' 의 리메이크 (remake) 시리즈가 오늘부터 KBS - 2TV의 채널을 탄다.

시대 배경은 조금 현대쪽으로 당겼지만 줄거리는 거의 그대로다.

추억은 과거에 잃어버린 것일까, 지금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27년만의 재제작인데, 한국의 27년이 얼마나 긴 시간을 압축하고 있는지 아는가.

영악해진 세상에서 과연 아씨의 수난에 동정하고 공감하던 그 순수가 아직 남아 있을까. "왜 그렇게 비관적인 전망을 내리십니까. 한국인의 눈물이 메말랐다던 1983년 6월, 이산가족찾기 TV방송이 시작되자 전국이 눈물 바다를 이루었잖습니까. 아직도 한국인은 눈물이 풍부합니다.

" "물론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 여인상이 구원 (久遠) 의 여인상이라고 말하지는 말길 바랍니다.

" "그 이유는?" "부당한 억압과 인격 말살을 거부해야 한다는 여성들의 자각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 (고려대 徐之文 교수가 오늘의 여권론을 '훈계' 한 李文烈의 소설 '선택' 을 비판하며 한 말) "그런 인고 (忍苦) 의 세월이 있었고 지금도 잔존한다는 점을 보여주겠지요. 어쨌든 고전에 속하는 이 드라마가 현재의 TV드라마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순화 (醇化) 시키면 좋겠습니다.

" "그 문제점이라면?" "요즘의 드라마, 특히 주부가 많이 보는 드라마는 요설 (饒舌) 또는 무내용 (無內容) 으로 일관하지 않습니까. 주력 시청층이 여기에 중독되다니, 안방 오락극장으로서의 TV드라마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너무합니다.

" "드라마는 여성 시청자를 잡아야 하고 대선후보들은 여심을 잡아야 합니다.

군대 간 아들을 둔 엄마들을 화나게 해선 안됩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그 얼굴이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싫증이 난다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나면 안됩니다.

너무 튀는 부부상은 오히려 여성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고 오늘도 여성지 (女性誌) 는 외칩니다.

" "그건 본격적인 정치 얘기 같은데요. "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아닙니까. " "아, 그 혐오스런 이전투구 (泥田鬪狗) 의 장 (場)!"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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