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체제하의 통신개방]3.장비업계 집단고사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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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달들어 삼성전자.LG정보통신.대우통신.한화 등 국내 정보통신장비분야의 업체들은 노심초사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보통신부가 지금까지는 통신교환기 입찰에서 담합형태로 국내 다수업체를 선정해왔으나 통신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방돼 외국업체들도 달려드는 내년부터는 이 방식이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탓이다.

이들 업계는 내년 비동기식 (ATM) 통신교환기 입찰에서 정통부가 단호하게 1개 업체만 선정할 것이라는 정보도 듣고 있다.

통신 장비업계에 나눠먹기식의 편안했던 호시절이 가고 살벌한 경쟁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미 루슨트테크놀로지스, 스웨덴 에릭슨 등 외국업체와의 입찰경쟁도 이들에겐 이만저만 버거운 일이 아니다.

국내 한 업체 관계자는 "세계무역기구 (WTO) 경쟁체제에서 세계 통신장비업계는 많아야 8개 업체정도 살아남을 것" 이라고 전망하고 "생사의 기로에서 사업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한다" 고 말했다.

국내 장비제조업체들은 이제까지 안정된 내수기반을 토대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미국 루슨트테크놀로지스사가 국내업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한국통신에 교환기를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업계의 시장기반이 급속히 약해지고 있다.

미국은 민.관 합동 공세를 펴 국내 장비시장을 개방한뒤 지난해초 처음 한국통신에 1백40억원 규모의 교환기를 판매했다.

이어 이동통신.차세대 교환기.무선시내망 (WLL).미래영상휴대폰 (IMT - 2000) 등 시장을 차례로 노리고 있다.

지난해 7월 미 무역대표부 (USTR) 는 장비시장의 불공정성을 이유로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 (PFC) 로 지정했다.

그결과 미국은 8개월만에 총5천9백억원 규모의 장비를 판매하고나서 PFC지정을 철회했다.

이같은 개방의 파고 앞에서 그동안 국내업계의 경쟁질서 역시 취약부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7년간 WTO통신협상 대표로 활약했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최병일 (崔炳鎰.경제학) 교수는 "국내 장비업체가 너무 많은 것이 경쟁력이 약화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 라고 말한다.

ATM교환기의 입찰이 대표적인 예다.

국내 교환기 4사는 지난 92년부터 올해까지 ATM교환기 개발에 총4천7백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향후 시장규모는 2002년까지 1천9백억원. 따라서 투자회수가 될 턱이 없다.

지금같은 나눠먹기를 할 수 있다해도 업체당 수주액이 연간 95억원에 불과하고 그나마 외국업체가 가세하면 '파이' 는 더욱 작아진다.

이에 따라 정통부내에서도 경쟁입찰을 통해 1개 업체만 선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어설픈 국산품애용 구호도 경쟁력 향상에 큰 걸림돌이다.

국내 기술로 해결하겠다며 무분별한 투자를 감행, 품질도 떨어지고 외국제품에 비해 단가도 비싸져 낭패를 겪기 일쑤기 때문이다.

현대전자가 최근 개발한 중형컴퓨터 필그림의 핵심기술은 이 회사 미국 현지법인 소속 외국기술진에 의해 개발됐다.

국내보다 한발앞선 외국인 보유기술를 채용해 국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제품개발에 성공, 4개월만에 3백대를 수주하고 1백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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