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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와 굴토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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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두어달 전의 어느 봄날 명동에서 남산 1호터널로 진입하기 위해 우회전 깜빡이를 켰을 때였다. 문득 '토끼굴 폐쇄'라는 표지가 길을 막아섰고, 길이 막히는 걸 참지 못하는 서울쥐인 나는 "대체 저게 왜 토끼굴이지?"(그럼, 내가 토끼란 말이야?) 어쩌고 하며 썰렁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때였다. 뒷자리에서 비몽사몽 졸다시피 하던 시골쥐 비슷한 아들 녀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거였다. "네? 굴토끼가 어디 있다고요?"

하하하. 시원하게 뚫린 터널길로 접어들어 기분이 한결 나아진 서울쥐는 심기일전의 웃음을 날리며 시골쥐의 말길을 가볍게 막아섰다. "쯧쯧, 굴토끼가 아니고 토끼굴 말이다, 토끼굴! 그리고 대체 굴토끼 따위가 어디 있다고 그러니?"

하지만 시골쥐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엄마는 그것도 모르세요? 토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산토끼고요, 다른 하나는 굴토끼란 말이에요. 산토끼는 산과 들을 날렵하게 뛰어다니며 덤불 같은 데서 사는 놈들이고요, 굴토끼는 좀 둔하고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놈들이라 굴을 파놓고는 위험을 느끼면 재빨리 굴속으로 숨어버린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큰아빠 농장의 토끼들이 저마다 굴을 파고 들락거리던 것이 생각났다. 게다가 말길이 이쪽으로 접어들면 대체로 시골쥐의 판정승으로 끝나던 터였다. 하지만 일단 녀석에게 져주기로 마음먹은 까닭은 무엇보다 시골쥐 스타일의 굴토끼보다는 서울쥐 스타일의 산토끼에 마음이 가는 나에게, 엄마 같은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산토끼 쪽이라고 단언하는 아들의 말이 흡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굴토끼와 산토끼. 토낏과 동물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산토끼(hare)고, 다른 하나는 굴토끼(rabbit)다. 굴토끼가 굴속에 들어앉아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놈들이라면, 산토끼는 세상 밖을 뛰어다니며 혼자 살아가는 놈들이다. 말하자면 산토끼는 반쯤 일어선 레디고 일보 직전의 상태로 재빨리 움직일 준비를 하는 놈들이라면, 굴토끼는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은 채 발달한 후각.청각.시각을 동원해 사태의 추이를 예민하게 관찰하는 놈들이다.

따라서 산토끼는 '나 홀로'를 지향하는 자신감 넘치는 날쌘돌이들인 반면 굴토끼는 '더불어'를 의식하는 사려 깊은 뚜벅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아들과 나는 생태학적으로든 사회학적으로든 적당한 산토끼와 굴토끼의 비율이 3대 7 정도일 거라는 데 생각을 모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가. 어쩌면 우리 사회에는 나 자신을 포함해 산토끼적인 자의식의 등딱지를 흉물스럽게 짐 지고 다니는 기괴한 인간들이 지나칠 정도로 넘쳐나는 것은 아닐까.

바야흐로 노마디즘 또는 유목민의 시대를 외치는 이즈음에 유랑적인 동시에 날렵하며, 개인적인 동시에 주체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토끼적 마인드야말로 새삼스럽게 각광받는 덕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개인에서 사회로, 역사로, 다시 우주로 시야를 넓혀감에 따라 산토끼적인 마인드에서 굴토끼적인 마인드로, 다시 굴토끼적인 마인드에서 산토끼적인 마인드로의 심화와 확장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개체심(個體心)의 가장 안쪽과 우주심(宇宙心)의 가장 바깥쪽에 좀더 겸허하고 성찰적인 모습을 한 굴토끼 한마리씩을 길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특히 오늘의 한반도처럼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출렁이는 파도 위에 올라탄 잠수함 속의 토끼와도 같은 우리는 개인과 사회, 역사의 비전에 대한 예지를 얻기 위해 무엇보다 '더불어'를 의식하는 사려 깊음 속에서 예민한 후각.청각.시각을 가다듬는 굴토끼를 벤치마킹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너도, 대통령도, 만두도, 장관도, 29만원도, 국회의원도, 파병도, 방송도, 웃음 또는 울음도, 신문도, 삶 또는 죽음도 죄다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강영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