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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기증에 상속·유언까지 ‘아름다운 마침표’ 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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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존엄사법 제정을 위한 입법 공청회'가 열린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은 보건의료관계자와 일반 시민 200여명이 3시간이 넘는 참가자들의 토론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며 자리를 떠나지 않는 보기드문 광경이 연출됐다. 지난해 뇌사에 가까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노인의 자녀들이 "어머니가 자연스런 죽음을 맞게 해달라"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한 소송에 대해 지난달 10일 고등법원이 '존엄사'를 인정한 판결을 내린 것이 입법화 논의의 큰 계기다. 하지만 이날 공청회를 달군 열기는 20여일 전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 효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제 발표자들도 모두 김 추기경이 의식을 잃기 전 의료진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아름답게 주변을 마무리하고 선종한 김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웰다잉'에 대한 인식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다. 다음은 중앙SUNDAY 전문.

고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은 한 조문객이 성당 입구에 전시된 사진을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한 사람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주는 울림이 크다. 지난달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얘기다.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 이후 장기기증이 급증했다. 의식을 잃기 전 의료진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존엄사법’ 입법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시민단체와 노인복지관 등에는 차분히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죽음준비교육’ 관련 문의도 잇따르고 있다.

‘하늘소풍’ ‘아름다운 이별’ 용어도 다양

“우리 추기경 어르신 소식 듣더니 영감님(남편)도 당장 안구 기증 신청을 했어요. 일흔일곱이나 됐는데…. 요즘엔 배우자 동의만 있어도 되더라고요. 난 솔직히 아직 두려워 마음을 못 먹었어요. 그렇지만 나도 의식 잃고 쓰러지면 어르신처럼 산소호흡기 같은 거 달지 말고 내 명대로 가고 싶어요. 살아 있을 때 좋은 일이나 많이 하고 가야 할 텐데….”

김말복(73·여) 할머니는 조용히, 얼굴에 미소까지 띄운 채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나이가 되면 불안하고 아쉽고 초조한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과정인데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려고 해요.”

김 할머니의 태도가 이렇게 바뀐 것은 지난해 말 시립동작노인종합복지관에서 죽음 준비교육인 ‘하늘소풍 준비하기’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부터다. “‘하늘소풍’이란 말에 끌렸어요. 참가자 중엔 남자 노인들도 있었는데 특히 유언장 작성할 때는 누구 하나 안 운 사람이 없어요.” 이 프로그램 담당자인 황흥기 사회복지사는 “일부러 ‘죽음’이란 말을 뺐는데도 안내 포스터를 보고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며 화를 내는 어르신도 있었다”며 “하지만 참가하신 분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고 특히 올해는 아직 세부일정 없이 4월 개강 계획만 잡혔는데도 추기경 선종 후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황 복지사는 “지난해만 해도 참가자 16명 중 남자 어르신은 2명뿐이었는데 요즘 문의하시는 분은 모두 남자 어르신”이라고 덧붙였다.

2006년부터 ‘아름다운 생애 마감을 위한 시니어 죽음준비학교’를 매년 두 차례씩 개설해 온 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은 벌써부터 9월 수강생 신청을 받고 있다. 17일 개강하는 봄 강좌는 이미 정원 20명을 넘겨 31명이 등록했고, 대기자도 20명이다. 1기부터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죽음준비교육 전문강사 유경(사회복지사)씨는 “몇 년 새 인식이 많이 바뀌어 실버교육기관은 물론 자원봉사·가족복지 관련 단체에서도 ‘웰 다잉’ 강의 요청이 크게 늘고 있다”며 “죽음준비교육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거부’나 장기기증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추기경께서 정말 많은 것을 해 주고 가셨다”고 말했다.

복지관의 죽음준비교육 프로그램은 대개 10회 안팎으로 진행된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인생 되돌아보기-잘못된 죽음인 자살에서부터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는 말기환자 등 다양한 죽음에 관해 이해하기-장기기증이나 유산 나누기 등 나눔 알기-직접 유언장이나 자서전 써 보기 등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필요한 경우 법률 전문가 등을 초빙해 강의하기도 한다. 유씨는 “이런 전반적인 이해 없이 ‘입관체험’ 등 일회성 이벤트 위주의 프로그램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각당복지재단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는 91년 창립하면서부터 죽음준비교육에 앞장서온 단체다. 말기환자들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호스피스(완화의료) 교육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해 왔다. 요즘엔 지도자 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해로 3기째인 ‘웰 다잉 강사 양성과정’이 11일 시작된다. 그동안 130여 명이 수료해 30여 명은 활발하게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 홍양희 회장은 “10여 년 전만 해도 죽음에 대해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지만 최근엔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아졌다”며 “50세 이상 전문직 은퇴자들이 ‘노(老)-노(老) 교육’을 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름다운재단도 일반인 대상의 ‘제4기 아름다운 이별학교’ 강좌를 준비 중이다. 담당인 김현아 간사는 “인터넷 등을 통해 이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된 분들이 요즘 많이 문의해 오신다”며 “유산나눔사업의 일종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웰 다잉 강좌보다 ‘나눔’의 가치를 알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말기환자 본인 입장 존중해줘야

4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존엄사법 제정을 위한 입법 공청회’도 웰 다잉의 한 형태에 관한 공개토론의 자리였다. 신상진(한나라당) 의원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입법안을 토대로 발의한 이 법은 말기상태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 등을 담고 있다. 보건의료계 관계자와 일반 시민 등 200여 명의 방청객은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주제발표와 토론을 끝까지 지켜봤다. 지난해 뇌사에 가까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노인의 자녀들이 “어머니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해 달라”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한 소송에 대해 지난달 10일 고등법원이 ‘존엄사’를 인정한 판결을 내린 것이 입법화 논의의 큰 계기다.

토론의 좌장으로 참석한 허대석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아직 ‘존엄사’라는 용어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우리나라도 이제 말기환자에 대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반영해 줘야 한다는 데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단계에 이른 것 같다”며 “국회에 계류 중인 호스피스 관련법이 함께 정비되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도록 제도화한다면 생명과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함께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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