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상투적 기억' 지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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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라파 누이 (Rapa Nui)' 를 아는가.

남아메리카 해변과 타이티 사이에 있는 섬. 이스터 섬이라고도 불리는 곳. 1772년 네덜란드의 한 선원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불가사의한 문명을 일궜던 태평양의 작은 '대지' .하지만 지금은 원주민마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저주의 땅이다.

그곳엔 '모아이' 라는 돌 거상 (巨像) 만 지난 날을 기억하며 누워 있다.

침략.노예화.전쟁으로 이어지는 근대사만 남고 옛날 찬란한 문명의 기억은 사라졌다.

한때 현지인들이 식인종으로 살았던 기록은 어디서 나왔을까. 망각은 깊고 허무하다.

때론 두렵다.

애타는 '라파 누이 신드롬' - .

그게 어디 거창한 문명에만 적용될쏜가.

깡그리 잊혀진 이름 홍찬 (洪燦) 을 건져 올렸다.

영화진흥공사 남양주 종합영화촬영소에서. 도시에서는 포기하고 있었던 밤하늘의 별을 헤면서. 국내 최연소 여성영화감독 이서군 (李曙君.22) 이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주연 여배우 이지은 (애송이 살인청부업자 나나 역) 과 안재욱 (몽상만화가 조한 역)에게 뭔가 주문하는 말을 흘려 들으면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홍찬을 기억하려 했다.

만 40년전 그가 인근지역 안양에 종합영화촬영소를 만들었던 사실을 들춰낼 심산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망각을 되돌려 세우는 일이 너무 고단하기도 했을 테지만 그것 또한 라파누이 현상 같은 것이었다.

하기야 그의 촬영소는 아파트단지로 변해 흔적도 없다지. 참 묘하다.

하필이면 이서군이 찍고 있는 영화 타이틀까지 '러브.러브 (Rub Love)' 다.

직역하면 '사랑의 기억을 지우다' 인데 또 무엇을 지우자는 건가.

'서기 2028년, 서울' 이라는 부제까지 갖다 대면 혼란은 더하다.

30년후 미래상황에 전통 한옥.한복을 재배치하고 있는 이감독의 의도는 도대체 무언가.

영화 속의 남녀는 그렇게 나온다.

조한을 죽이려 들었던 나나는 오히려 남자가 건넨 망각캡슐을 먹고 기억을 죄다 상실한다.

단순함을 딛고 새로 일어서는 두사람의 사랑. 분명 현란하게 펼쳐질 미래사회의 사랑법 또는 생존 패러다임은 망각을 전제로 해서만 싹틀지 모른다.

20세기 초.중반을 아주 단순하고 우직하게 살았던 홍찬씨의 삶이 21세기 초반에 풍미할 복고무드로 설정된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부쩍 영화중흥의 60년대를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여전히 무기력한 한국의 영화산업 탓이다.

부천영화제 행사에 잠시 들렀던 신상옥 감독의 회고 - "당시 한국 영화계 인사가 홍콩 같은 델 가면 서로 모셔 가려고 법석이었는데…. " 여기에는 홍찬씨의 영화열정을 빼놓기 힘들다.

손수 해낸 '국산영화 장려를 위한 면세조치' 와 '연출기술인력 공채' 가 대표적이다.

이후 불어닥친 한국적인 것 다 갈아 치우기. 도무지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가긴 어려웠다.

유학파들이 줄줄이 카드를 들이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모두들 '헐레이션 효과' 에 빠져 허우적거렸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바깥의 강렬한 빛으로 한동안 안이 뿌옇게 비치는 것, 사진의 경우 강한 광선으로 피사체가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 말이다.

이서군도 미국 유학생이다.

공부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충무로에 서면 유학파로 분류될 게 뻔하다.

그러나 영화 '러브.러브' 에서 그는 이상한 유학파로 모습을 드러낸다.

"한복에 청바지를 걸치는 식의 포스트 모더니즘, 그 이후를 상상한다.

전통/현대 또는 동양/서양의 구분이 없어질 것으로 본다.

구분이란 본디 상투성에서 나온다.

나는 그것을 비틀어 재배치할 것이다.

" 그래서 '러브.러브' 는 상투적 사랑의 기억을 지우자는 거다.

우리말 표현에서 망각/사랑의 두 단어 구분은 다시 소멸하고. 그녀가 충무로 주류의 관습을 깨고자 하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다.

'제너레이션 넥스트' 에겐 구분이 없다고 했것다.

홍찬을 모르는 이서군이지만 그녀가 주류로 떠올랐을 때,가까스로 되살린 홍찬의 영화사랑도 함께 여물리다.

라파 누이의 슬픈 사연을 툭툭 털면서….

허의도 기자

[과거/미래의 두 사람]

□홍 찬□

일제시대 수도극장 (현 스카라극장) 말단사원 입사로 영화와 인연. 해방후 극장경영주 변신. 전국극장협회장 역임 (46~51년) . '국산영화 장려를 위한 면세조치' 를 관철해 영화부흥의 기틀 마련 (55년) .안양종합영화촬영소 건립 (57년) . '수도영화사 연출 기술인력 공채' 실시 (59년) .국내 최초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 제작 (58년) .군사혁명으로 파산 (61년) .56세로 별세 (64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특별상 수상 (97년) .

□이서군□

유년기때 '8㎜영화협회' 회원이었던 외할아버지를 통해 '활동사진' 에 눈을 뜸. 중고교 시절 어머니 김수경 (소설가.시인.열음사 대표) 씨와 함께 1천여편의 영화관람. 미국 뉴욕대 영화학과 입학 (94년) .박철수 감독의 '301 - 302' 에 시나리오로 데뷔 (95년) .영화진흥공사 주최 '95 금관단편영화제' 에서 '자살파티' 로 대상 수상. 현재 촬영중인 영화 '러브.러브' 로 감독 데뷔. '자살파티' 를 장편화해 선댄스영화제에 출품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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