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만화가 황미나,중국 후롱과 언어장벽 넘어선 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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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여류만화가 황미나 (36) .

'굿바이 미스터 블랙' '불새의 늪' '레드문' 등으로 한국 순정만화의 대모로 인정받는 그녀가 나이답지 않은 설레임으로 요며칠을 보냈던 것은 오랜만에 날라든 친구의 소식때문이었다.

중국의 여류만화가 후 롱 (胡蓉.27) .그녀가 24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97아시아만화대회에 중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다는 소식은 검찰의 만화가 소환사태 대책회의와 원고마감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상큼한 기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대회 일정을 훑어보던 황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인 롯데호텔에서 전시장인 광화문 서울시립미술관까지 걸어다니도록 돼있었던 것. 불현듯 하반신 지체장애자인 후 롱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오른쪽 다리가 매우 불편했지만 한사코 걸을 수 있다며 휠체어를 마다했던 그.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대회기간중 계속 함께 다니려고 마음먹었지요. 내친김에 아예 숙소도 호텔에서 제 집으로 옮겨버렸어요. 그뒤 버스가 마련되긴 했지만. " 이들의 만남은 지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9월 일본에서 열린 제1회 동아시아 만화대회에 참석한 황씨의 눈길이 한 작품 앞에 멈춰졌다.

'섭소천' (섭小천) .우리에게 영화 '천녀유혼' 으로 알려진 이 작품이 비단위에서 새롭게 형상화되고 있었던 것. "무엇보다 그 분위기가 아주 독특했어요. 저희는 보면 느낌이 오거든요. 게다가 보통 연필로 그리고 그 위에 펜으로 덧칠을 하는데 이 친구는 밑그림없이 그것도 그냥 붓으로 그린다는 소리를 듣고 꼭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지요. " 물어물어 서로 대면을 하게 된 이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황씨는 중국어를 몰랐고 후 롱은 중국어밖에 몰랐던 것. 마침 한국에서는 중국어 통역이 따라가지 않은 상태여서 서로의 안타까움은 더했다.

그때 나타났던 사람이 홍콩의 만화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던 일본인 시즈에 무라나카씨. 황씨의 짧은 일본어가 중국어로, 다시 일본어로 통역되면서 여기에 다시 한국인 일본어통역까지 가세하는 4중 통역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런 거추장스러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 막히면 그 자리에서 그림으로 그리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아쉬운 이별을 나눈지 일년이 되던 지난 23일 저녁. 서울에 도착한 후 롱을 맞기 위해 황씨는 직접 차를 몰고 나갔다.

황씨는 이미 문하생중 화교학생을 확보해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친 터. 환한 미소로 도착한 후 롱은 선물보따리를 펼쳤다.

자신의 최근 작품 '백추련' (白秋練) 이 연재되는 월간잡지 '초속풍폭' (超速風暴) 3권과 비단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물감 2박스.비단 두루마기 2개. 멸종위기에 빠진 중국고유의 흰돌고래를 지키려는 물고기 여신 백추련의 이야기인 이 만화의 높은 인기 덕분에 흰돌고래 보호시설이 만들어졌다는 후 롱의 얘기에 황씨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후 롱은 "지난번 일본에서 본 언니의 작품에서 일본만화와 다른 한국적인 선과 이미지를 보았다" 며 "언니와 밤새도록 얘기하고 싶다" 고 기쁜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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