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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세기를찾아서]34.베네치아의 자유공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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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기차로 알프스산맥을 넘는 약 7시간의 여정 끝에 베네치아의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앞에서 바로 버스를 타고 베니스운하를 내려와 메트로폴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서울의 버스와는 달리 이곳의 버스는 물위를 달리는 배입니다. 택시도 물론 배입니다. ‘바다와 결혼한’수국(水國)베네치아의 정취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내가 짐을 부린 호텔의 벽에는 비발디가 사계(四季)를 작곡한 방이라고 석판에 새겨놓았습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나폴레옹이‘세계를 여는 창’이라고 불렀던 아드리아해의 진주(眞珠) 베네치아. 1백18개의 섬들과 그 섬들을 잇는 3백78개의 다리.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운하 위를 미끄러지듯 저어가고 있는 곤돌라가 그림같습니다. 밤이 되면 노래로 부르던 산타루치아의 별들이 하늘에도 뜨고 물 위에도 뜰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일찍이 동서교역의 3대 거점의 하나였던 베니스가 바로 이곳 베네치아입니다. 셰익스피어가‘베니스의 상인’샤일록의 비정한 상혼을 고발하고 있지만 베네치아는 중세적 윤리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윤리의 산실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새로운 질서와 윤리가 비록 상인자본의 윤리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은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부터 벗어난 질서이며 중세 이후의 사회를 열어가는 새로운 윤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베네치아는 이미 전성기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과거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바닷가의 개펄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1천년 동안 공화제를 지켜오며‘르네상스의 알맹이’와 근대유럽의 원형을 만들어낸 이 작은 도시는 여전히 당당합니다.

나는 먼저 산 마르코광장에 있는 플로리안카페를 찾았습니다. 산 마르코광장은 세계의 모든 여행객들이 한번씩은 반드시 찾는 관광명소이며 이 광장에 있는 플로리안카페는 이름 그대로‘꽃과 같은’사랑을 받는 광장의 꽃입니다.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들이 아직 나오지 않은 광장에는 너무 많은 비둘기떼들만이 모이를 뿌려줄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플로리안카페는 1720년에 문을 연 이래 18세기 1백년 동안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의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사상가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토론하였던 명소입니다. 장 자크 루소·바이런·괴테를 비롯하여 바그너·토머스 만·발레리·조르주 상드 등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은 지성인이 없었을 정도로 근대 지성의 성지였습니다.

하루도 토론이 없는 날이 없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 플로리안카페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반과 몽상,마귀와 천사등, 요컨대 공룡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만들어낸 곳이었습니다. 신문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으로서 뉴스의 공장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세기의 탕자 카사노바의 활동무대였고 매춘과 도박의 아지트이기도 하였습니다. 비즈니스와 법률의 상담소였는가 하면 반(反)오스트리아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으며 공화주의자의 집결지였습니다.

중세의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인들의 부(富)를 기반으로 하여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18세기,이른바‘비발디의 세기’ 1백년 동안 베네치아는 계몽사상의 요람이 되어 중세의 교조적 사상과 지배질서를 대체하는 해방사상의 요람이며 온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페의 가장 큰 특징은 중세의 신분귀족사회를 대체할 지식인을 탄생시킨 곳이라는 데 있습니다. 지식인과 지식인 사회를 만들어낸 해방공간이었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로리안카페는 이제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한 과거의 공간입니다. 카페의 지배인 우르소트 주세페는 프랑스의 고(故) 미테랑 전대통령이 생전에 다녀갔고 나만 모르는 유명한 배우 멜 깁슨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에는 유럽의 지성인들이 1년 또는 적어도 1개월 이상 이곳에 머물면서 서로 교유하고 토론하였지만 지금은 관광 패턴이 변하여 이벤트 중심으로 단기간에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쉼터로 전락하였음을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카페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여 이곳은 중세를 벗어난 공간이 아니라 근대를 연 공간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한 시대의 해방공간이 변함없이 다음 시대의 해방공간으로 그 자리를 계속해서 지킬 수는 없습니다. 다음 시대를 위한 공간은 다음 시대를 담당할 새로운 계층이 또다른 곳에 그러한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나는 이러한 정신의 해방공간이 우리 시대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삶과 사고 속에 이러한 공간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세계의 곳곳에 그리고 우리나라의 곳곳에 이러한 자유로운 사고의 영역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유공간은 나를 낡지 않게 하고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의 서울에 이러한 공간이 있는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어느 곳에 이러한 공간이 있는지는 더욱 알지 못합니다. 당대 사회를 살면서 당대 사회의 사고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혼자서는 힘겨운 일입니다. 우선 당대의 과제를 짐질 계층이 그 토대를 만들어야 하고 그 토대 위에서 여러 사람의 중지(衆智)를 한곳에 모아냄으로써 가능할 것입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자유공간의 전통이 지금껏 이어져 세계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베니스영화제가 열리고 있는가 하면 1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습니다. 미래를 향하여 열려 있었던 공간은 그 미래의 이후에도 역시 여전히 자유의 공간으로 남아 있음에 놀라게 됩니다. 베네치아를 떠나기 위하여 공항으로 향하다 표지판에서 비로소 공항의 이름이 마르코 폴로공항임을 알고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동방견문록’의 주인공인 마르코 폴로의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면모에서 다시 한번 이 도시가 키워온 열린 정신을 보는 듯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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