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따기]작곡가 백병동씨의 창작産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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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작곡가 백병동 (白秉東.61.서울대 교수) 씨의 '징크스' 는 음악인들은 웬만큼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대작 (大作) 이다 싶은 작품을 위촉 받으면 몇주일이고 잠적해버리는 것이다.

서울시내 호텔을 잡아놓고 두문불출하면서 창작에 몰입하는 집중력 때문일까. 오랜 산고 (産苦)끝에 탄생한 그의 음악들은 한결같이 버릴 것이 없는 수작 (秀作) 들이다.

이번에는 칩거 (蟄居) 기간이 6개월로 늘어났다.

그것도 해운대나 설악산이 아닌 일본 도쿄 (東京) 다.

장마철이 아직 끝나지 않은 도쿄의 9월은 서울의 7월만큼이나 후텁지근하고 짜증스럽다.

도쿄실내가극장 (東京室內歌劇場) 의 위촉을 받아 白씨는 한편의 실내오페라를 작곡중이다.

성 라자로 마을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느라 일생을 바친 이경재 (李敬宰) 신부의 삶과 이 마을의 훈훈한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다.

李신부는 현재 건강이 안좋아 남해안에서 요양중이다.

이번 작품은 지난 94년 서울오페라앙상블이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초연했던 이연국 (李演國) 작곡의 '오타 줄리아의 순교' 와 오는 10월3~5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오르는 강석희 (姜碩熙) 작곡의 오페라 '초월' 과 마찬가지로 한국 가톨릭사를 소재로 한 오페라. 도쿄실내가극장을 이끌고 있는 오키 코우지 (沖廣治.69)가 평생 숙원사업으로 위촉한 오페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白씨가 작곡중인 오페라 제목은 '눈물로 뿌려진 씨앗은' 이다.

일본인 작가 나카무라 사카에 (中村 榮)가 대본을 썼다.

앞의 두 작품이 가톨릭 박해사를 중심으로 한 비극적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번 작품은 밝고 건강한 줄거리로 돼 있다.

"오페라라면 러브스토리라든지 극적인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스토리 자체가 평범해 음악적인 기복을 어떻게 줄 것인지 고민입니다.

" 12월말까지 보컬 스코어 (성악 파트와 피아노 반주의 악보) 를 완성시킨 후 내년 여름 관현악 편곡까지 완성할 계획인 白씨는 현재 일본어로 돼있는 대본을 철저하게 읽으면서 일본어의 억양을 음악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연구중이다.

오는 10월초 숙소를 도쿄 근교의 시바 (千葉) 로 옮겨 창문으로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작곡에 몰두할 계획. "프리마돈나역을 맡길 여자역이 없어 하늘의 소리 (천사역) 를 소프라노에 맡겼습니다.

종교적인 내용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이경재 신부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종교적인 배경을 빼고서라도 음악적 생명력이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한국가곡이 성악가들의 무관심으로 애창곡 수준에서 머물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白씨는 이번 오페라가 성악의 서정성과 현대음악 특유의 긴박감을 잘 결합시켜 과거의 오페라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도쿄 =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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