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걸쭉한 만담…보존회 설립등 부활 움직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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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우리 민족은 '한 (恨) 많은 민족' 이 아니라 사실 '웃음많은 민족' 이다.

워낙 살기가 힘들다보니 한이 끼어들었을 뿐이다.

이같은 정의를 증명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만담이다.

나이 오십이 넘는 독자들이라면 기억하리라. 장날 시골 가설무대 주위로 빽빽히 모인 청중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천연덕스럽게 이어지던 장소팔.고춘자의 재치 문답을 들으며 배꼽을 쥐던 그때를.

"만담은 웃기를 좋아하되 맺힌 한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우리 민족의 화술입니다.

판소리와 줄타기,가면극 사이사이에 들어가던 재담처럼 만담의 뿌리도 민족의 정서속에 있습니다. "

우리 만담의 산 증인 장소팔 (76.본명 張世建) 씨의 말처럼 만담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거의 유일하게 서민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준 장르였다.

레코드 대중화와 더불어 큼직한 진공관 라디오 시절까지만 해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만담은 TV의 화려한 쇼, 코미디에 밀려 순식간에 무대뒤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최근 그 명맥을 이으려는 움직임이 조용히 그리고 차근차근 일고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만담보존회 (회장 장소팔)가 창립됐고 올해 3월1일에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만담보존회 창립공연이, 5월에는 탑골공원에서 전국만담경연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방송에서도 올 봄철개편부터 중장년층을 위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만담을 다시 등장시켰다.

SBS '이주일의 코미디쇼' 중 김의환.강성범의 속사포같은 말대결 코너가 그 대표적 사례.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시의 사양문화 육성지원금 2천만원을 받아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만담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만담 백년사' (비매품)가 출간됐다.

"원래 장소팔선생 일대기를 쓰기 위해 시작했는데 자료수집을 하다보니 고구마 넝쿨처럼 파묻혀 얽혀있는 우리 만담의 역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는 것이 종로문화원의 반재식 (潘在植) 원장이 말하는 출판 계기. 이 책에는 만담가 장소팔.김영운.김윤심, 국악인 이은관.김뻐꾹.이만석, 재담가 박해일, 악극 기획자 윤철등 관련 인사들이 말하는 우리 만담의 지난한 역사가 행간마다 스며있다.

재담과 발탈의 명인 박춘재, 전설처럼 남아있는 만담의 개척자 신불출과 그의 파트너였던 나품심.신은봉.신일선.윤백단.김연실등 여자 만담가들. 또 만담작가이자 연기자인 윤백남, 성대묘사의 일인자 황재경, 배뱅이굿의 이은관, 그리고 김영운.고춘자 콤비의 이야기등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만담의 인기는 책속에서 고스란히 살아난다.

특히 경기도 파주의 무의탁노인 요양원에서 신불출의 유일한 여제자 김윤심을 찾아내 6.25이후 만담의 공백기를 메울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이 얻어낸 결실중 하나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 9월10일 화려했던 젊은 날을 뒤로하고 쓸쓸한 말년을 마감했다.

30년대 인기 만담 '선술집과 인생' 중 한토막을 보자.

"영감님 선술집을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다 뿐이냐. 첫째 값싸고 배부르니 경제적이요, 서서 먹어 쉬 내리니 위생적이요, 친구 서로 만나 보게되니 사교적이요, 아모나 오게되니 대중적이요, 이땅에서 놀게되니 향토적이로구나"

"호!" "얘, 그 안주하나 다우"

"사과를 드려요, 마메콩을 드려요?"

"잘못된 게 있거든 사과를 주고, 내가 맘에 있거든 마메콩을 주고, 아니꼽거든 꼴뚜기를 주려무나"

만담에는 당시의 생활과 시대상도 생생하게 담겨있다.

일제시대의 경우 서양문명에 휩쓸리는 조선 지식인들의 줏대없는 모습이 주로 소재가 됐다.

갓쓰고 양복입은 남자와 쪽지고 양장한 신여성으로 비유해 조롱하는 식. 또 곁말이라하여 바로 말하지않고 한자의 음등을 이용해 다른 말로 빗대는 우문현답 또는 동문서답식 말투도 크게 유행했다.

양말은 서양당나귀, 숫처녀는 무연탄 처녀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렇게 인기있던 만담이 그렇게 무력하게 자취를 감춰야했던 이유에 대해 만담인들은 가르치고 보존하는데 소홀했던 자신들의 무관심을 먼저 꼽는다.

세월이 흘러도 늘 제자리인 내용도 풀어야할 숙제중 하나다.

만담보존회 한백훈 (50) 기획국장은 "지난번 경연대회때 40~50대 장년층 선수가 많이 나와 젊은이들의 참여를 기대했던 주최측을 실망시켰다" 며 만담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부족을 아쉬워한다.

그래서 뜻있고 재주있는 젊은이가 명맥도 이어주었으면 하는 만담인들의 바램은 후사가 없어 대가 끊길 것을 두려워하는 사대부가문 종손의 그것만큼이나 애절하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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