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타향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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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33년 고복수 (高福壽)가 불렀던 '타향살이' 가 우리 민족의 한 (恨) 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가사속의 '고향' 이 태어나서 자란 곳을 뜻하는데 그치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아가는 서글픔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제치하의 우리 민족은 이 노래를 부르며 망국의 한을 되새기곤 했다.

그때는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의 고향은 기억속에만 존재할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서 자란 곳' 으로서의 고향은 그 자리에 그냥 있지만 고향다운 이미지는 퇴색할대로 퇴색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너나 할 것없이 모두가 실향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7세기 영국시인 존 밀턴은 불후의 명시 '실락원 (失樂園)' 에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 (禁斷) 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라 읊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고향은 하늘나라나 에덴동산 뿐이며 그 고향은 살아서는 갈 수 없다는 뜻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즐겨 쓴 '하이마트로제 (잃어버린 고향)' 는 이 세상 어디에도 뿌리내리고 살 곳이 없다는 근원상실감을 의미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마음속의 고향' 만으로 어머니의 품속같은 포근함과 넉넉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다.

실제로 고향의 풍물이 아무리 달라져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의 고향' 만은 언제까지나 똑같은 모습이다.

특히 '갈 수 없는 나라'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에게 '마음속의 고향' 은 반세기 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도 고향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 살고싶어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은 서해안 쪽에 많이 살고, 함경도와 강원도 북쪽 출신은 동해안 쪽에 많이 산다는 통계가 나온 적도 있다.

실향민들이 그런 것처럼 타향살이를 해보지 않고서는 고향의 참뜻을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향을 스스로 버렸거나 등진 사람들에게도 고향이 어머니의 품속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을까. 전체 국민중 44.3%가 타향살이를 하고있다는 통계청의 발표는 올 추석에 3천만명이 대이동을 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우리에게 있어 고향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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