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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서신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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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편지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하는 ‘서신 정치’를 활용했다. [중앙포토]

“서민아파트 점검이 일단 끝난 듯하오나 장마가 지나고 월동에 앞서서 다시 한 번 전반적인 점검이 있어야만 월동에 념여(염려란 뜻)가 없을 듯합니다.”(1970년 9월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보낸 편지)

중앙SUNDAY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각계각층에 보낸 서한 20여 통을 입수해 3월 1일자로 보도했다. 이 편지들은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와 고 민관식 문교부 장관 유족, 박태준 전 총리,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 등이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다.

조선 정조의 친필 어찰 299통이 발견된 뒤 통치자들의 ‘서신 리더십’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 편지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서신 리더십’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서신에서는 국가 근대화를 위한 강한 집념과 절대 권력자의 권위, 노련한 통치 기술이 느껴진다.

◆친필 서신은 강력한 리더십의 수단=박 전 대통령은 서찰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다. 정확한 분량을 추산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측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당한 분량의 친필 서신이 각계에 전달됐다. 당시 청와대 부속실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은 구체적인 업무지시는 물론 그때그때 떠오른 정책 아이디어들을 메모지에 적은 뒤 관료들에게 보냈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편지는 양지·음지를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에 전해졌다. 박 전 대통령에게 친필 서신은 절대 권력자의 의지와 관심을 대내외에 천명하며 파워 엘리트들을 장악하는 강력한 리더십의 수단이었다.

◆때론 질타하고, 때론 독려=박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 시절 배운 글씨에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의 지도를 받아 독특한 서법을 구사했다. 주변에선 “글씨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살기(殺氣)마저 비친다”며 ‘사령관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용환 전 장관은 “박 전 대통령 열정의 20%가 계획 수립에 쓰였다면, 나머지 80%는 실천하는 데 사용됐으며 편지는 매우 유효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①1970년 2월 2일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적은 ‘마패 편지’. 박 사장에게 최대한 힘을 실어 주기 위한 배려가 엿보인다.
②70년 9월 19일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서민들의 겨울나기를 걱정하는 세심함이 묻어 나온다.
③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조국은 ‘방가(邦家)’다. 나라를 친근감 있게 부르는 표현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흔히 사용했다고 한다. 72년 3월 상공부 차관에 임명된 김용환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에게도 “방가(邦家)를 위하여 더욱 큰 성공을 빌며”라고 쓰인 편지가 건네졌다.
④76년 6월 10일 내려 보낸 ‘신행정수도 위치 선정 고려사항’.


78년 4월 28일 박기석 당시 도로공사 사장에게 보낸 편지는 박정희식 치밀함의 정수를 보여 준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 관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10주년이 되는 1980년 7월 7일에 발간을 목표로 지금부터 그 자료를 수집 정리하도록 하시오.…그렇게 하자면 명(明) 1979년 말까지는 일반 원고가 대략 완료되어야….”

형식적인 행정을 질타하는 경고성 서한도 보인다. 한 교통부 장관에게 보낸 서신은 신랄하다. “부산 수영공항 사무소 내부시설의 유지관리 상태가 지극히 불량합니다.…책임자들이 전연 관심이 없거나 태만하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기(其)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일례를 든다면 화장실의 청소가 되어 있지 않거나….”

70년 1월 9일 농림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는 농산물 가격 안정을 강조하며 “매년 이 문제는 문제가 생기면 떠들다가 그 시기가 지나면 또 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금년은 연초부터 근본 대책이 세워져야 할 줄 압니다”는 질타를 담았다. 국토 개발에 대한 관심과 전문적인 식견이 담겨 있는 서한도 적잖다. 73년 11월 24일 작성된 ‘유휴토지개발 촉진’이란 메모에는 미개발 상태에 있는 전국의 야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다섯 장에 걸쳐 정리하며 마을 지형도까지 직접 그렸다.

◆위로나 격려도 담아=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소외돼 있거나 힘들게 사는 서민들에게도 편지는 보내졌다.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는 “잘나가는 사람보다는 변방으로 물러났던 사람을 많이 챙겼다”고 회고했다.

반혁명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김연준 한양대 창립자 등이 이런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의 고초가 자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음에도 서신을 통해 위로하는 ‘박정희식 정치공학’은 김형욱·최홍희 등의 변심으로 충격을 받은 뒤 더욱 두드러졌다. 69년 7월 18일엔 장택상 전 총리가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위로 편지를 보냈다. 또 78년 2월 2일엔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복을 만드는 회사인 ㈜태흥의 권태흥 사장에게 편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런 편지는 상당수가 금일봉과 함께 전달됐다. “여비 약소하오나 소납(笑納·기쁘게 받음) 앙망합니다” 같은 구절이 자주 나온다. 원호처장에게 쓴 서신에는 청룡부대 복무 중 숨진 병사의 모친을 위한 병원비를 전달하며 “여사 생계 문제에 대하여도 대책을 세우시면 나도 가능한 조력을 하겠습니다”고 썼다.

돈과 권력이 함께했던 정경유착의 그늘도 보여 준다. 서한 곳곳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상당한 액수의 정치자금을 거뒀고, 이를 지지기반 유지에 활용했음이 암시돼 있다.

◆“우리 지만이 만세!”=대통령 이전에 그는 아버지였다. 막내아들 생일을 축하한 75년 12월 15일 편지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지만이에게! 우리 지만이의 17회 생일을 충심으로 축하한다. 명년은 고3에 진학하게 되고 또 대학입시 준비에 전력을 경주해야 할 해인 만큼 더욱더 몸을 튼튼하게 하고…너의 어머니께서도 오늘 먼-나라에서 지만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아버지와 꼭 같은 당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우리 지만이 만세!”

10·26 하루 전 총무처 장관으로 재직 중 간암으로 별세한 심의환씨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엔 “인생은 원래 무상한 것이고, 회자정리라고 하였으니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것은 정한 이치인 줄 알면서도…”란 대목이 담겨 있다. 위로를 위한 이 편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편지가 돼 버렸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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