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 별도 입법통한 사생활 보도규제 설득력 약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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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국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사망 뒤 언론소유주와 편집자들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여론은 다이애나가 파리 사고현장에서 벌어진 일과 같은 추격전을 자극해 온 언론의 손에 죽은 것이라는 오빠 스펜서 백작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또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여론도 뜨겁다.

이번 사건이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대중지) 을 포함한 언론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언론이 다이애나의 사생활을 들춰내길 원하는 대중들의 욕구에 쫓기지만 않았다면 엄청난 돈을 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파파라치 (프리랜서 사진가)가 활동할 시장은 없었을 것이다.

언론의 편집자나 사주들이 사진의 출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면 자기회사 기자들이 지켜야 하는 윤리기준을 파파라치는 전혀 지키지 않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다이애나의 죽음은 언론의 자기규제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사생활보호법 같은 강제규정이 있었다면 이번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프랑스 언론은 엄격한 사생활보호법의 규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파라치는 다른 나라 독자를 위해 다이애나를 추적했다.

설사 영국에 그같은 법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이애나와 같은 공적 인물의 사생활 침해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존 메이저 정권이 4년전 제안한 사생활보호법 초안처럼 대부분의 사생활보호법은 보통시민들의 사생활에 대한 침해를 금지하는 동시에 '공공의 이익' 을 보호하고 있다.

장래에 국왕이 될 사람의 어머니의 이혼 뒤 남자관계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관심은 정당한 것이다.

이 점을 부인한다면 왕실의 왕위계승 위기문제를 보도하지 않기로 언론들이 신사협정을 맺었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론만을 대상으로 한 법률제정은 무모하며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물론 언론은 사회의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법률을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묵과할 수 없는 언론의 폐단이 법률에 포착되지 않아 법률을 강화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 법률은 모든 사람을 규제대상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있다.

영국법에 유럽인권헌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균형을 이루는 사생활의 권리를 천명하고 있는 이 헌장을 도입할 경우 사생활보호법을 별도로 제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사생활 침해사건이 발생할 경우 법원이 헌장에 입각해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제안은 이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력한 재발방지장치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을 성급히 결정하는 것보다는 낫다.

특수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좋은 법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정리 = 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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