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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세상보기]노블레스 말라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높은 신분 (노블레스)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프랑스 말 '노블레스 오블리지' (noblesse oblige) 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 너무 많이 인용된다.

우리 말에도 양반은 양반답게 처신하라는 말이 있지만 지금 반상 (班常) 의 구별이 어디 있나. 그래서 이 말을 자주 꺼내면 이미 타파된지 오래인 신분사회로의 회귀를 은근히 바라는 것같은 오해를 받을까봐 겁난다.

이 명언을 남긴 프랑스 정치가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 (1764~1830) 자신도 프랑스 최초의 육군 원수 레비스공작 집안 출신 아닌가.

한 영어사전에 따르면 이 말의 뜻은 이렇다.

'사회적 신분이 높고 돈이 많고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혜택 (advantages) 을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 , 또 다른 사전은 '부자나 귀인이 훌륭하고 자비롭게 행동해야 할 도덕상의 의무' 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가계와 혈통을 떠나서라도 이 원칙이나 의무에 구속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많다.

한국에는 고위직도 많고, 부자도 많고, 모든 젊은이가 대학교육을 받는 초 (超) 고학력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잖은가.

그런데도 요즘 도무지 이에 구속되지 않는 노블레스들이 너무 많은 것같다.

그래서 이 경구 (警句)가 자주 인용돼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이회창 (李會昌) 후보의 두 아들이 체중미달로 병역이 면제된 의혹은 그야말로 대선 판도를 뒤바꿀만한 사건이 돼버렸어. 고의 감량이나 조작의 증거가 명백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우선 고위층 자제들이 병역을 필하지 않은데 대해 화를 내고 있어. " "하도 화가 나니까 대선 후보와 국회의원, 대기업 회장 등 사회 저명인사들의 병력 (兵歷) 은 물론 그 아들들의 병역 이수 여부까지 들추고 있잖나. 그 결과 국회의원의 25%가 군대를 안 갔고, 그 아들들의 병역면제율이 일반의 두배를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 " "한국의 노블레스들은 '의무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그것을 양심적으로 실행하는 길뿐' 이라는 괴테의 말을 상기하면 좋겠어. " "그들이 겁이 많아서 그러진 않았을거야. 공교롭게 입대할 시기에 몸이 아파서 그랬을거야. 굳이 프랑스말로 한다면 노블레스 말라드 (noblesse malade) 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병든 노블레스들이란 뜻이지. " 프랑스말 말라드는 '병든, 탈난, 기능이 고르지 못한' 등의 뜻이 있다.

그러니까 병역과 관련짓는한 한국은 고장난 사람들이 이끄는 나라가 된다.

말라드란 말이 건강과 관련된 뜻만 가지고 있으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사전을 들쳐보자.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부패한, 쉬어버린, 상한, 못쓰게 된' 의 뜻까지 있네. "라스베이거스 미라주 호텔의 한국인 직원 로라 최의 명단에 오른 30여명의 저명인사는 모두 수백억원대의 도박을 하다가 당국의 수사를 피해 이리저리 피신하는 신세가 됐다네. 이들 가운데는 자신의 기업에서 돈을 빼내 1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50만달러를 날리고, 돌아와서는 뺑소니 사고를 남에게 덮어씌운 기업 회장님도 계시다네. " "그러고 보면 한국은 사회적 일탈 (逸脫) 을 일삼는 노블레스들의 천국만이 아니야. 말라드란 말뜻 그대로 부패하고, 식상하고, 폐기처분돼야 할 경우도 너무 많아. " 내친 김에 다시 한번 사전을 들춰보니 말라드의 맨 마지막 뜻은 속어로 '머리가 돈, 미친' 이라고 써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블레스들은 ×친 사람들이란 말이야? 그건 너무했다!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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