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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인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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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가 육신을 땅에 묻고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벌써 1주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뵌 것은, 그러니까 6개월 전 그분이 병원에 입원하러 집을 나섰을 때였나 봅니다. 제가 누구냐고요? 작은 곰 인형입니다. 사는 곳은 서울 혜화동 주교관 침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침실 사진을 접한 분들 중엔 침대 머리맡에 앉은 저를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약간의 의아함과 함께.

제 소개부터 드려야겠네요. 하얀색 천 피부에 몸속은 솜과 천 조각으로 채워져 있는, 평범한 봉제 인형입니다. 우리 곰 인형들이 여러분과 친숙해진 것은 100여 년 전입니다. 미국 26대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902년 11월의 어느 날 사냥에 나섰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한 측근이 어린 곰을 산 채로 잡아와서는 그에게 총으로 쏘라고 권했습니다. 루스벨트는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다”며 풀어주라 했다지요. 이 이야기가 실린 워싱턴 포스트 만평을 본 뉴욕의 잡화점 주인 모리스 미첨이 백악관에 편지를 보냅니다. “곰 인형에 당신의 애칭 ‘테디(Teddy)’를 붙일 수 있게 해달라.”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미첨은 ‘테디 베어’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 후 우리는 인간들과 애환을 함께했습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에 가라앉았을 때는 유족에게 선물할 검은색 테디 베어가 선보였고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물자 부족으로 팔이 짧고 몸통이 작은 디자인으로 바뀌었지요. 70년대 오일쇼크로 미국·유럽의 완구 회사들이 문을 닫으면서 우리의 생산지는 아시아로 옮겨왔습니다. 이젠 할머니가 됐을 이 땅의 앳된 여공들이 봉제 완구를 만들기 시작한 때도 아마 그 즈음일 겁니다.

지금은 어른들 가운데도 우릴 아끼는 분이 많습니다. 특히 한 분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수필가 피천득 선생입니다. 피 선생은 2년 전 97세로 영면할 때까지 곰 인형 세 마리를 침실에 두었지요. 감기지 않는 플라스틱 인형 눈이 안쓰러워 잠자리에 들 때 안대로 가려 주셨습니다.

추기경께서 저를 침대에 둔 것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귀하게 여기는 동심(童心)의 눈을 지니셨기 때문 아닐까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온 삶을 바치신 의지도, 끝없이 자기를 낮추신 저력도 어린아이처럼 울고 웃을 수 있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에서 나왔던 건 아닐까요. 오늘도 제가 미소 짓는 것은 그의 온기가 제 몸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권석천 논설위원